대뜸 하긴 민망한 말이지만,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사람마다 기본 스탠스가 있지 않나. 나는 상대가 누구든 그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류애라고나 할까, 착한 척도 아니고 그냥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나의 가장 큰 기쁨은 상대의 진심을 듣게 되는 것, 그리고 어떤 크기로든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아낌없이 주는 듯한 나의 사랑이, 사실은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가페인 척’ 하는 플라토닉에 가깝다. 말하자면, 나는 한쪽만이 아닌 쌍방의 공감을 원한다. 내 눈앞에 있는 당신과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감정 깊숙이 어루만지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누구를 만나든지 내 마음은 이미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좀처럼 쉬운 일인가. 나처럼 사랑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상대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대화는 내가 그/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끝난다. 한 번쯤은 나의 진심에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 보지만, 나와 다른 마음의 크기에 의기소침해질 뿐이다.
지독한 짝사랑을 할 바엔 혼자 있고 싶어진다. 사실 꽤 오랫동안 새로운 만남을 피하고, 만나더라도 대화를 줄였다. 마치 사람을 싫어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대도, 실망도 없이, 평온함을 유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다시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서 깨달았다. 내 마음속의 사랑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구나. 아닌 척했지만, 여전히 나는 이들과 이어지기를 바라는구나,라고.
요즘의 나는 매일이 실연을 당하는 기분이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집에 오는 버스에 몸을 싣으면 울적해진다. 오늘도 내 이야기는 하지 못했어. 하지만 괜찮아… 아마도. 이 마음이 아가페라면 좋을 텐데, 데리다의 말처럼 인간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환대란 불가능한 건지.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밉다. 멋대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내 맘을 안다면, 다들 날 싫어하겠지.
“이상하죠, 당신 앞이면 뭐든 편하게 이야기하게 돼요.”
뿌듯하고 고마운 말이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더 많이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때로는 분하다. 내가 더 사랑하는 탓에 나는 항상 져 주는, 귀를 기울이는 역할이다. 그냥 물음표를 던져 버리고 사랑과 관심을 마구마구 갈망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만나는 당신’을 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