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에 쥐고 있으면 어찌 알겠나
소년 만화의 주인공에 매료될 때가 있다. 요즘은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그렇다. 루피는 어디서나 ‘고무고무-!’로 시작하는 필살기로 팔을 죽죽 늘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곤 한다. 그 필살기에 적들은 벌벌 떨고, 동료들은 안심한다.
만화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도 취준생으로서 가끔씩 나름의 필살기를 준비하게 되는 때가 있다. 어쨌든 합격을 위해서는 이 면접의 주인공인 척, 개성이 있는 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관심 갖고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쉽게도 제한된 선발 인원으로 인해...'
그러나 몇 개월만의 면접은 형편없었다. 객관적으로 아주 망했다고 볼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회사를 나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이 만져졌다는 것이다.
아뿔싸.
그건 나의 필살기, 직접 적어 간 아이디어와 기획들이었다.
열심히 유튜브 재생목록을 복습하면서(원피스를 보고 싶은 걸 참아가며!) 열 개도 넘는 아이템들을 생각해갔는데, 관련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고 완전히 그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휘갈긴 글씨의 그 종이를 그들에게 직접 건넬 수는 없더라도 어떻게든 이야기해보려 가져갔는데, 그 종이는 한 번도 내 주머니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왠지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내가 붙을 만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그들이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 내가 필살기를 쓰지 않았어도 나를 알아봤어야 하는 게 아닐까 - 라며 가망 없는 생각을 한 것이다.
탈락 문자를 보는 순간, 솔직히 나는 꽤 화가 났다.
작년 12월, 최종 탈락 화면을 마주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회사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도대체 왜,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내 말투가 차분해서? 의욕이 없어 보이는 표정 때문에?
5분 전까지 최고의 면접관이었던 PD님이 원망스러워졌다. 나의 포트폴리오를 보며 면접 내내 우와 멋지다, 정말 대단하네.라고 칭찬 일색을 해놓고서는(물론 그 칭찬을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면접 대상자를 존중하는 표현 방식이 감사했다), 정말 그렇게 내가 대단하다면 당연히 뽑히지 않았겠는가. 그도 아니면, 그 ‘대단함’을 포기할 정도로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타입이 아니라는 건가?
물론 이 원망과 불평들은 가짜다. 남을 탓함으로써 내 맘 속 깊숙이에 자리한 '왜 주머니 속에서 종이를 꺼내지 않은 거야?'라는, 스스로를 향한 날 선 원망을 숨기고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CM송을 들을 때마다 웃기지 말라며, 말하지 않고서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나도 모르게 내가 싫어하는 식으로 움직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잊지 말자. 고무고무를 외치지 않는 루피는 주인공이라 할 수 없다. 내가 나를 특별하게 여기든 말든, 주머니 속에만 그것을 넣어둔다면 그 누가 알겠는가. 비단 면접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을, 나 자신을 알아주길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에 대해 외치는 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오늘은 고무고무를 외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의 이야기는 언젠가 주인공의 과거회상 편에서 찬찬히 등장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