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이 하고 싶었다.
2018년 3월, 아직 한국에는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시기에, 나는 교환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그때 일본은 이미 벚꽃이 절정이었다. 싹을 틔우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눈앞에 만발한 벚꽃이 펼쳐져 있으니, 마치 타임슬립을 한 기분이었다. ‘아~ 빨리 꽃이 보고 싶다! 그냥 일주일 당겨야지.’하며 말이다.
이렇게 계절이 바뀔 즈음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 속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즐길 수 있다. 특히 봄에는 '벚꽃'이라는, 매우 시각적인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아이템이 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두 배다.
시간여행을 한지도 벌써 사 년, 오랜만에 치트키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자. 이미 꽃이 만발해 있을 그곳에서 서울 사람들보다 먼저 봄을 맞이하고, 다시 돌아와 또 같은 봄을 두 번 씩이나 즐겨야지. 하지만 제주도까지 왔다 갔다 할 시간과 돈은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순천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순천에 여행을 가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뭐랄까 당연히 유명한 지역이지만, 항상 사람이 북적이는 느낌의 관광지는 아닌 듯했다. 순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굳이 꼽자면 전에 관심 있던 아이돌 K군의 고향이라는 것, 그리고 동천이라는 하천을 따라 쭉 벚꽃이 핀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런 곳이 가고 싶었다. 일상의 향기가 물씬 나는 동네에서,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잠시 집에서 나와 꽃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가볍게 걷고 싶었다.
동천에는 이미 벚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거기에는 끝이 없는 것 같은 벚꽃길과, 그 아래로 자전거를 타거나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산책로가 펼쳐져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온 나와 동생은 천천히 벚꽃길을 걸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만발한 벚꽃 사이로 드문드문 산책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조깅을 했다. 계속해서 보고 싶은 장면들이었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일부러 봄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면, 순천에서는 이들의 일상에 봄이 자연스레 찾아왔다는 느낌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는 어디를 가든 동천이 흐르는 대로 걸어갔다. 동천은 순천 어디에나 흐르고 있어서, 식당을 가든 카페를 가든 조금만 돌아가면 동천을 따라서 갈 수 있었다. 그만큼 그 길을 걷는 게 즐거웠다. 건강 앱에 표시된 ‘16,380보’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주민들과 같은 길을 걷고 걸었지만,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려지거나, 바뀌는 건 아닌가 보다.
우리는 ‘여행 오셨나 봐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실 이건 아무데서나 듣기 어려운, 특별한 말이다. 서울이나 제주도 같은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당연히 여행객이 많기 때문에 굳이 하지 않는 말이고, 관광지가 아닌 동네에서는 당연히 여기 누가 여행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과 여행이 절묘하게 섞인 순천이기에 들을 수 있는 말 아닐까.
근데 이 ‘여행 오셨나 봐요’는 그 말과 함께 외지인에 대한 환영과 친절을 함축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본인도 순천 사람이 아니면서 카페를 열심히 추천해주시던 일식집 사장님, '좋은 밤, 아니, 좋은 낮 되세요.'라고 말해준, 갈레트가 맛있는 프랑스 가정식 식당의 외국인 사장님, 여행 왔냐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안다는 듯 환타 파인애플 맛을 서비스로 준 국밥집 사장님.
작은 환대들이 모여 낯선 이 지역에 대한 애정과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벚꽃과 사람이 어우러진 풍경과, 덤으로 얻은 친절들과, 그래도 맛은 보자며 산 순천 유명 제과점의 빵 두 개를 품에 안고,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나의 두 번째 봄으로 돌아가기 위해.
p.s. 우리 동네의 벚꽃은 솜처럼 하얀데, 순천의 벚꽃은 짙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