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이 제일 잘 팔리는 시대에 던지는 질문
우리는 나다움이 가장 잘 팔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식품 회사는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고 얘기하고, 의류 회사는 내가 입는 것이 곧 ‘나’라고 말한다. 화장품 회사에서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째서 자기네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심지어 가전제품도 나다워야 하는 게 요즘이다.
내가 하나씩 사들이는 물건들이 ‘나’라면 내 선택 하나하나의 조합이 결국 ‘나’인 걸까? 그럼 나는 그때그때 온전히 나다운 선택을 해오며 살아왔나? 아니 근데, 나는 내가 선택하는 걸 즐겼던 적보다 선택하기 귀찮았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귀찮고 머리 아픈 선택들을 도와주고 있는 (혹은 간섭하고 있는) 온라인 세상의 알고리즘은 24시간 365일 내내 나의 모든 대화와 행동 패턴을 수집하고 세세히 분석하여 ‘나’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스타트업 관련 계정을 많이 팔로우하고 있는 내 피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자주 보인다. ‘나다운 커리어 쌓기 : 코딩 배우면 연봉이 이만큼 오르는데 아직도 망설여요?’, ‘주말에도 나답게 일하기 좋은 사무실 여기 있어요!’, ‘연휴에는 역시 나답게 인사이트 가득한 아티클을 읽어야죠!’ 알고리즘 씨 저는 나다운 건 모르겠고요, 저는 그저 주말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고 싶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나다운 게 뭔지도 알고, 나답게도 살고 있는 걸까? 아니, 이제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나답게 살고 싶긴 해?
나답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다면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 나는 줄곧 ‘나’로 사는 게 힘들었다. 이런 말을 어렵사리 털어놓을때면 내가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문자 그대로 ‘나’로 존재하는 게 힘들었을 뿐인데. 어떤 언어나 형태로 나의 그 느낌이나 찰나의 기분을 표현해내는 게 너무 어려웠다. 나는 쉬운 단어를 고르고 골라 그걸 ‘갇혀 있다’고 표현해냈다. 나는 ‘나‘에게 갇혀 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어쩔 수 없이 ‘나’로 눈뜨는 게 싫고 잠들기 전엔 내 안에 스스로 파놓은 아주 깊은 구렁텅이 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험을 셀 수 없이 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답게 산다’는 문장에는 일단 살아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내게 나답게 산다는 건 일단 내가 갇혀 있는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구렁텅이 속을 구석구석 훑어낸 밤에는 안간힘을 써서 밖으로 나와 잠을 청하고, 해가 뜨면 기꺼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나랑 공존하기’ 혹은 ‘나랑 잘 지내보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나답게 산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용기와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나의 이유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이유로 나답게 살기보다 주어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게 더 속 편할 때가 훨씬 많으니까.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나답게 살기보다 나다운 죽음이 더 쉬울 때도 있으니까. 더 편하고 더 쉽다고 해서 그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도 아니고 비난받을 만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답게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