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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Aug 18. 2020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라는 으스스한 이야기를 알고 계신지? 경험상 내가 빨간 휴지 줄까아~ 까지만 말한 채 뜸을 들이고 있으면, 상대방 쪽에서 백이면 백 파란 휴지 줄까아~ 를 기다리며 답답해하는 걸 보니 아마 대부분 알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정말, 분명히, 알고 계신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이 이야기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며칠 전 지인이 다이소로 휴지를 사러 간다길래 나도 따라나섰다. 그렇게 요새 유통되는 휴지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이 빨간 휴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도대체가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아~ 뒤쪽의 내용이 떠오르질 않았다.


처음에 나는 이것을 단순 해프닝 정도로 여겼다. 내가 이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자 이제 장난하지 말고 진지하게, 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일단 앞쪽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젠장, 앞쪽 이야기 또한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해프닝이 아니었다. 이것은 사건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더욱 열심히 헤집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구 코너를 지나 욕실 코너를 건너 결국 식기 코너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아무것도 떠올려내지 못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크게 좌절한 나는 친구에게, 저기 미안하지만 내가 복잡한 일에 좀 연루되어서.. 라는 말을 남긴 채 홀로 다이소를 뛰쳐나왔다. 그리곤 근처 유료 주차장 한켠에 쪼그려 앉아 엉엉 울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문제의 빨간 휴지 이야기를 검색해 달달 외웠다. 그리곤 이 빌어먹을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찾아봤는데, 때는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메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쳤고 한국도 역시 좌우 이념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절, 빨간 휴지도 파란 휴지도 아닌 새하얀 휴지를 만들던 유한킴벌리사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잠입해 요주의 직원이 홀로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화장실 전등 스위치를 내리고 후레쉬로 변기 칸 밑바닥을 비추며 빨간 휴지 줄까아~ 파란 휴지 줄까아~ 라고 사상 검증을 했던 일이 민주화 이후 도시 전설로 흡수되어 민간으로 퍼지게 되었다.. 는 이야기는 제가 방금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미안합니다.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하 수상한 시절이었으니.


아무튼 세상엔 빨간 휴지 이야기처럼, 너무나 익숙한 탓에 참나 그쯤이야 완전 알고 있지, 라고 믿고 지내는 것들이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생일이 언제였더라.. 분명 알고 있었는데.. 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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