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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Aug 20. 2020

페이볼잇 데이 오브 더 위크


한동안은 좋아하는 요일이랄 게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고선 무슨 요일이든 그 날이 그 날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요일이야 알 게 뭐람, 이라는 태도로 3일이든 10일이든 내 멋대로 시간의 단위를 묶어 지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요일을 떠올려내야 할 때면, 일상 속에 그것을 추론해낼 단서가 마땅치 않아 난감해지곤 했다. 이전엔 분명 그렇지 않았다. 시간을 평일과 주말, 그러니까 7일 단위로 단단히 묶어두고는 요일 뒤에 물음표가 찍히기가 무섭게 오늘은 뭘 했으니까(해야 하니까) 무슨 요일이겠다, 라는 식으로 번쩍번쩍 떠올려내곤 했다.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오늘의 요일을 맞춰보려 낑낑대다 보면, 문득 예전엔 정말 다른 사람들과 함께여야만 하는 일들을 하며 살았음을 실감한다. 요일이란 것도 결국은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해나가기 위한 협업 도구일 테니까. 요일 감각을 상비하고 다녀야 했던 시절이 꽤 먼 일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렇게 멀어진 일은 아닌데도. 최근까지도 룸미러 안에 분명히 맺혀 있었다. 좀 작긴 했지만.


아무튼, 요즘엔 다시 좋아하는 요일이 생겼다.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게 된 것이다.


과거에도 좋아하는 요일을 딱 하나만 뽑으라면 역시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쉬는 날이니까. 토요일도 쉬는 날인데 왜 굳이 일요일인가. 일단 두 요일에는 지정학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과 바짝 붙어 있는 토요일에는 아무래도 아직 감속 구간이라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무언가를 처리해낸다, 라는 평일의 관성에서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있다. 금요일 저녁까지 숨이 차게 달리다 자, 이제 페이스를 좀 낮춰볼까, 하며 밀린 빨래도 하고 친구와의 약속에도 나가고 목욕탕에도 다녀온다. 요컨대 토요일에는 (쉬는 날이긴 하지만) 금요일까지와는 다른 장르의 일을 하는 날, 이란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일주일을 한 묶음으로 본다면) 일요일은 평일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평일과 쉬는 날의 국경을 어슬렁대는 거수자에게 일요일은 단호히 경고한다. 국경 너머의 일들이야 나는 모르겠다. 이제 감속 구간은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분명히 정차다. 음.. 이거야 이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쉬어야겠단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그야말로 휴일인 것이다.   


또한 나는 주 6일제와 주 5일제 사이의 시대적 격변기를 급식을 먹으며 보냈는데, 그때의 경험도 휴일로서의 토요일과 일요일의 매치업에서 주저 없이 일요일의 손을 들어주는 데 심리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토요일은 등교하는 토요일(등토)과 노는 토요일(놀토)로 쪼개져 있는, 말하자면 반쪽짜리 휴일에 불과했다. 토요일 아침, 비몽사몽인 채로 오늘이 등토인지 놀토인지를 가늠해보던 그 순간의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등토임이 확실시됐을 때의 그 아득한 상실감이 여전히 나의 깊은 곳에서 휴일로서의 토요일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놀토, 를 검색해보니 요즘에는 노는 토요일보다는 놀라운 토요일, 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의 준말로 통용되는가 본데.. 이거야 격세지감이랄까 뭔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든다. 동년배들은 아시겠지요?


다시 돌아와, 현재 일반적인 직장을 다니지도 않는 데다, 일요일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만들던 디즈니 만화 동산도, 개그콘서트도, 짜파게티 요리사도, 1박 2일도 이젠 모두 내 삶에서 사라져버렸지만, 나는 다시 일요일을 좋아하게 됐다. 이것은 내가 최근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헬스장이라는 건 일단 등록과 수납쯤이야 자동문에 가깝지만 그다음부터는 매일매일의 진입 장벽이 꽤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 장벽의 높이를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하루의 어느 순간 이제 슬슬 헬스장에 가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계시처럼, 지금 이 순간 헬스보다 중요한 일들이 마구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방 청소도 하고 장도 보고 괜히 엄마 아빠한테 전화도 걸어보고.. 정 사정이 급하면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이불을 메고 옥상으로 올라가 일광 소독이라도 추진해낸다. 평소엔 귀찮기만 하던 일들이 한순간에 굉장히 시급하고 흥미로운 데다 즐겁기까지 한 일들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너무 늦은 시간까지 헬스장 방문을 미뤄내는 데 성공한 날에는 와 오늘은 진짜 할 일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라며 터져 나오는 미소를 삼킨 채 아쉬움을 달랜다. 한편 죄책감이나 성장 욕구 등 어떤 이유로든 끝까지 버텨내지 못한 날에는 결국 착잡한 마음으로 헬스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헬스장에 도착해 데스크 직원분과 인사를 나누는 데까지만 해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일이 그럭저럭 술술 풀려나간다. 일단 내가 입장한 게 보여지고 말았으니 체면상 1시간 정도는 쇠질이 난무하는 헬스장에서 꼼짝없이 버텨내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입장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헬스장을 나선다면, 데스크 직원분은 겉으론 친절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도 흥, 저 사람은 운동은 얼마 하지도 않을 거면서 헬스장엔 왜 온 거람, 이라거나 흥, 저러니까 3개월째 다녀도 말라깽이에서 벗어나질 못하지, 라거나 흥, 저렇게 돈도 허투루 쓰고 근육도 없는 놈은 트럭으로 준대도 사양이야, 라는 생각을 할 것만 같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헬스장을 금방 나서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헬스장 이곳저곳을 어슬렁대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일이 술술 풀려가는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기긴 한데, 말라깽이 탈출에 진전이 없는 건 내 쪽에서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살이 안 찌는 체질이고, 내 근육들은 지가 내키지 않으면 죽어도 안 해버리는 제멋대로 AB형인 데다, 주인을 닮아 소심하고 부끄러움 많은 성격인 탓에 좀처럼 전면으로 나서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도 나름 카레맛 닭가슴살 같은 걸로 열심히 꾀어내보고는 있지만, 근육 쪽에서 협조를 안 해주니 나로서도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사정이 있어봤자 헬스장 데스크에 찾아가 저기요 제 근육에 대해서 말인데.. 사실은 이러쿵저러쿵해서 이러이러하게 된 일이니 부디 오해는 풀어주십시오, 라고 설명하기도 곤란한 일이라, 데스크 직원에게 키를 반납하고 헬스장을 나설 때마다 괜히 쭈뼛거리게 된다. 근육이든 인생이든 하루하루 성장해나간다는 실감이 있어야 지속해내기 편할 텐데, 애석하게도 두 쪽 다 전혀 시원치가 않아서 계속 끌고 나갈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전자의 경우엔 어엿한 멸치로서 국물 내는 데라도 쓰일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 아무래도 조금 더 어려운 문제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을 다시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하는 걸 잊었는데, 그것은 일요일엔 헬스장이 열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만큼은 아무리 출석하고 싶어도 관장님 쪽에서 거절이다. 오늘은 일요일인 걸 까먹고 헬스장에 갔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한껏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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