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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기 Nov 08. 2023

집안이 망하지 않고서야

44일 차

집안이 폭삭 망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모든 걸 잃을 수는 없는 거거든. 한 생명을 돌보기 위해선, 엄마가 모든 걸 완전히 잃어야 하는 거였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는 것 같은 낙차야. 잃어버린 일상에 대한 상실감이 커.


그래서 엄마는 다음 주에 뭔가 작당을 했어. 아빠는 그것 때문에 어제부터 속상해서 속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아. 사실, 아빠의 말도 틀린 건 아니야. 굳이 모르는 사람들 앞에 얼굴과 이름을 걸고 나서서 궁금해하지도 않을 사생활 이야길 한다는 게 불필요한 일이지. 말실수라도 해서 아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게,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자리인데. 그렇게까지 꼬아서 생각할 일인가 싶은 거야.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나마 제일 재밌는 얘기들일 텐데. 더욱이 엄마만 존재감 없이 소속에서 지워지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생겨서 말이야. 이게 어떤 일인지는 나중에 영시에게 말해줄게.


영시를 더 잘 돌보고 싶어서 산 책에 서두에 이렇게 쓰여있었어. "육아라는 것은, 특히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의 먹고, 자고, 싸는 일상을 책임지는 일은 노동 중에서도 최상위 육체 능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 일은 눈앞에 닥치고 내 발등 위의 불이 되어 떨어지기 전까지는 힘듦의 강도를 추측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어렵다." 한 줄 한 줄 어찌나 와닿던지. 넌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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