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고 싶은데 펜은 어디에 - 다섯번째
이 소설은 은희경 님 본인에게도 각별한 소설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소설을 포함한 작가님의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에 수록된 첫번째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고, 이후 작가님이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셨을 당시, 자선대표작으로 선정했던 작품이 바로 <그녀의 세번째 남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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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낯선 세계로 가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갈 거야. 행복? 그거야 알 수 없지. 어쨌든 다른 인간이 되어본다는 것으로 만족해. 지금보다 훨씬 나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거야.
낯선 삶을 원하는 일에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 아직 삶에 대해 기대가 많다는 것이 그녀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낯선 것은 불편하지만 매혹적이다. 삶을 익숙한 것과 낯선 것으로 채운다면 황금분할은 어떤 것일까.
그 가을 영추사 자갈길을 올라가며 그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 이 반지에 사랑을 맹세하는 게 아냐. 이 절에 맹세하는 거야. 반지는 잃어버릴 수 있지만 장소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댐건설로 그 장소는 사라졌습니다)
개들은 자기가 과자를 먹게 해줘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개에게 인정을 베푸는 인품을 흠모해서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개는 주인이 매일같이 귀여워하다가 갑자기 걷어차더라도 오랫동안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다. 그 일의 심각성에 대해 십 분 이상 고민할 만큼 진지하지도 않다. 다음날이면 또 와서 꼬리를 친다. 왜 부당하게 걷어차여야 하냐고 항변하거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점심으로 때울 일이지 술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을 꼭 저녁 시간에 불러내. 응, 당신 아무개 알지? ……우리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이든 틈입자일 뿐이며, 사실 우리는 그렇게 틈을 내줄 마음이 없으므로 당신은 초라한 틈입자인 거죠.
백팔번뇌의 '108'은 사람의 여섯가지 감각이 여섯 가지의 번뇌를 일으킬 때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그것들을 곱해서 나온 숫자라고 했다. 여섯 가지 번뇌에는 좋음, 나쁨, 즐거움, 괴로움뿐 아니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도 들어 있었다.
그들이 사랑했던 지루한 시간들.
그녀가 약속 시간에 늦을 때마다 그는 차갑게 비꼬았다. 시간 좀 지켜라. 이제 나한테 호의는커녕 예의도 없구나. 그는 그녀가 운전을 할 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을 처음에는 얼마나 칭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를 기다리며 흘려보낸 자기의 시간에 더 의미를 두었다.
너는 긍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쉽게 직장을 옮기지 않고 적응하는 미덕을 갖고 있잖아,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원한다는 걸 알고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알았기 때문에 그녀를 원망하는 거였다.
하지만 익숙해서 지긋지긋하고 편한 나머지 넌더리가 났고, 그런 시간들, 그들이 사랑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그녀인들 지금과는 다른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어느 날 그녀는 깨달았다. 그와 그녀. 그들처럼 사랑하면서 더이상 서로에 대해 알 것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해 있다는 것을.
ㅡ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을 잊어버리고 지붕 위에 올랐으면 사다리를 잊어버리고 개울을 건넜으면 징검다리를 돌아보지 않으며…… 이게 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럼 남자는 사다리였을까. 세번째를 향해 놓인 사다리. 그리하여 이제 그녀가 세번째 남자라는 지붕에 오르면 사랑하고 안 하고의 분별 없이 사랑을 하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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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칠 년 만의<타인에게 말걸기> 개정판에서 <그녀의 세번째 남자>는 순서가 네 번째로 밀려있습니다. 그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그리고 좀 수정된 부분이 있을까 비교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부연 설명이라 생각되는 문구를 한 두개 삭제한 정도 이외에는 거의 수정된 것은 없었습니다. (띄어쓰기 원칙이 또 바뀐 것인지 띄어쓰기가 달라진 곳이 있습니다. 표기법도 ‘짐 자무시‘에서 ‘짐 자머시‘로 바뀐것 같구요)
'개정판을 내려는 마음이 사뭇 무거웠던 것은 사실 글의 결점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문맥 속에 무심히 들어가 있는 그 당시의 편견과 선입관을 실감할 때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쓰는 사람 또한 그 시대의 사람이었으므로……'
개정판에 붙인 작가의 말은 자뭇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 괜찮아요. 개정판 책이 예쁘게 만들어진 것 같구요. 이왕 쇄를 거듭하면서 찍을 것 이렇게 개정판으로 발간해주시면 좋을 것 같애요. 깨끗한 책으로 또 이럴때 한번 더 읽어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