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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05. 2016

매직 인 더 문라이트 / 오, 사랑

우디 앨런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오, 사랑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를 즐겨 보기 시작한 것은 몇 해전 개봉한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서부터다. 최고의 문학가들이 실물과 꼭  닮은 배우들의 모습으로 재현되는 그 영화는 소설가 지망생인 나의 로망을 한껏 충족시켜주는 영화였다. <로마 위드 러브>, <블루 재스민>으로 이어진 우디의 영화는 시종 경쾌하면서도, 그 속에 선명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어 트렌디한 영화를 보는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작가주의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우쭐함도 함께 선사하곤 했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예고편에서 보여지는 몇 가지 캐릭터 설정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다. 세계 최고의 마술사 '웨일링 수(콜린 퍼스 분)'와 천부적인 영감을 타고난 심령술사 '소피(엠마 스톤 분)'의 대결이라니. 우디 앨런은 이 둘 간 세기의 대결에 이성과 영성이라는 오랜 서양철학사의 두 대립 개념을 부여하고, 그 사이에 로맨스라는 마법을 섞어 오랜 반목을 겪어온 양자를 화해시키려고 시도한다. 앨런다운 방식이면서도 신선하다. 또 가볍게 보이지만 그 가벼움을 통해 오히려 쓸데없는 무거움을 지닌 철학 개념의 대립을 꼬집는 것도 같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불변하는 영원성의 세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영성'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의 가치에 천착했다. 반면, 그의 오랜 라이벌이자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나 현실을 벗어난 '이데아의 세계'를 다소 인정하면서도 스스로는 거기에 끌려들지 않고 인간이 지닌 이성의 판단력을 최고의 경지까지 추구해나가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은 기독교 정신문명의 씨앗이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합리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노련한 마술사 웨일링 수는 철저한 합리주의로 무장하고, 세상의 모든 요소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의심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의 심령술사 소피는 아직 이성의 성장을 이룩하지 않은 미성숙한 존재로서 그 '영혼의 진동'에 집중하며 또 다른 세계와의 가교 역할을 한다. 그녀에게는 세상에 대한 의심보다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서구 유럽의 역사는 이 양자의 극단을 모두 경험해본 역사이다. 심령술사 소피 쪽으로 기울어본 역사를 통해서는 1000년 간에 이르는 중세 암흑기를 겪었고, 르네상스 이후의 극단적인 합리주의와 과학만능주의는 결국 세계대전쟁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이런 양극단으로의 길을 통해 참혹한 교훈을 얻은 집단이 그를 통해서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문제적인 일일 것이다. 


유명한 그림. 천상이냐(플라톤) 지상이냐(아리스토텔레스)


이성과 영성(감성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감성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일 것이다.)은 우리가 삶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모두 필요한 요소이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적절히 견제하게 될 때 우리는 보다 균형 잡힌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이 없는 극단적인 신앙은 가없이 미신 신봉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 그것이 아무리 기존 유명 종교의 표피를 덮어쓰고 있다 하여도 - 영성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한 이성은 고집불통의 독단이 될 수밖에 없다. 


영성이 하늘의 일이고 이성이 인간의 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몸으로 하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로맨스'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로맨스는 분명의 인간의 계 내에서 발생하는 일이면서도 그 특성은 이성으로 통제하거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요소가 포함된 일인 것이다. - 물론, 이것마저도 뇌내에 분비되는 화학물질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웨일링 수들이 많지만 - 


나는 우디 앨런과 같이 이성의 가치를 좀 더 높게 보는 비신론자이지만 역시 '로맨스'라는 마법마저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거부해서는 안 되는 신이 우리 생명에게 선사한 유일한 마법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우리들은 논쟁을 멈추고, 서로의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가 고집스럽게 지키려고 했던 것을 조금씩 양보하게 되니까. 결국 사랑이 이별로 끝난 후 제자리에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분명 사랑하기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결국 누군가를 사랑했던 뜨거운 기억은 우리 마음 어딘가에 남아 계속 우리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지 않던가. 그저 마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아무튼 이스라엘이여 팔레스타인을 사랑하기를.


* 이 글을 쓰던 때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습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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