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오 메뎀 <북극의 연인들>
사라져야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옛사랑의 기억, 유년 시절 입은 가슴의 흉터, 그리고 백야의 태양 같은 것들이다. 백야의 태양을 본 적은 없지만 앞의 두 가지 것들은 나에게도 있다.
오래 전의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 역 개찰구를 나서다가 반대편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를 보았다. 눈이 덮인 듯한 벌판이 뒤로 흐릿하게 펼쳐져 있고, 쓸쓸한 표정의 두 남녀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아래로는 '북극의 연인들'이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다. 포스터를 지나쳐 약속 장소로 가면서도 계속 마음속으로 '북극의 연인들'이라는 제목을 되뇌었다. 언젠가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되겠구나 싶은 예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 언젠가는 서둘러 오지는 않았다. 나는 어제서야 영화를 구해 보았다. 처음 포스터를 본 날로부터 수년이 지난 뒤다. 허나 마치 엊그제 포스터를 처음 목격했던 것처럼 시간의 간극이 모호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오토(OTTO)와 아나(ANA)라는 회문(回文 : 앞에서 읽으나 뒤에서 읽으나 똑같은 문장) 형식의 시적인 이름을 지닌 두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된다. 오토는 8살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을 겪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고, 아나는 역시 8살에 아버지를 사고로 영영 잃게 된 소녀다. 이른 나이에 굳게 믿었던 세계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두 아이는 서로에게 운명을 느끼고 이끌린다. 허나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북극의 연인들>은 오토와 아나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으로부터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오토가 얻게 된 이름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윤회의 흐름이 깃들어 있다. 두 아이가 서로를 사랑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것에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결핍의 감정에 대한 물음이 섞여 있다.
우리는 왜 '운명'이라고 하는 '감정'에 사로잡히는가. 우리가 어떤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할 때는 그 만남이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을 때이다.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날 것을 믿는다고 하던 영화 <접속>의 대사가 떠오른다. 당신에게는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는 답안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가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 강하게 이끌리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상대가 나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일 경우. 또 하나는 상대가 나와 너무나 유사한 종류의 인간일 경우이다. 하지만 좀 더 궁구해보면 위에 나열한 두 예는 실상 하나의 예다. 인간은 언제나 서로 일정 부분 유사한 점과 이질적인 점을 모두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상대가 나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느끼는 경우는 이미 상대에게 자기와 닮은 요소를 직감적으로 모두 파악하고 다른 것에 눈을 돌린 경우다. 상대가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느끼는 경우는 물론 반대로 자기와 이질적인 요소에 눈을 감아버린 경우다. 서로 다른 방식의 관점, 표현법을 지니고 있을 뿐 결국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지점은 자기 자신을 완벽한 형태로 완성하고 싶은 꿈이 아닐까. 그것을 '안정감'이라고 부르든, '인연'이나 '운명'이라고 칭하든 그 속성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중에 '우로보로스'라고 하는 거대한 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뱀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영양분을 얻는다. 그렇게 얻은 영양분은 자신의 꼬리를 재생하는데 다시 쓰인다. 영원히 재생되는 꼬리를 뱀의 머리는 영원히 씹어 먹는다.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일은 우로보로스의 머리가 우로보로스의 꼬리를 먹는 일만큼 필연적인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 결핍을 채워줄 것으로 예상되는 다른 인간을 욕망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물고, 서로가 서로를 재생해주는 관계를 형성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꼬리를 먹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거나, 혹은 꼬리가 재생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늦어버린다면 관계는 파괴되고 만다. 순환의 고리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를 지닌 상대를 인간은 무의식 중에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아나는 핀란드의 라플란드에서, 북극선 위에 앉아 수평선을 따라 흐르는 지지 않는 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결핍을 진정 채워줄 한 사람을 기다린다. 한 오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오토에게 이어지듯이 아나의 기다림도 다음의 아나에게 이어져서야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절박하게 지금 주어진 이 생에서 기필코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고 애쓰지만 어쩌면 우리의 지금 생은 지는 해에 해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 이 생이 지나고 나서야 다음 생에서 해가 떠오를 수 있을지도, 이 생은 그저 수평선 위를 조용히 흐르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또 한 사람의 오토가 무심코 내뱉은 대사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그녀는 내 인생의 전부였지요."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부한 대사다. 그런데 어쩐지 이 영화 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훨씬 더 묵직하게 마음속에 가라앉는 말이 되고 만다.
언젠가 라플란드에 가보고 싶어졌다. 백야가 있는 곳.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면 이쪽도 저쪽도 그저 모두 한 덩이의 생에 불과하지 않을까. 누구는 밤을 겪고 있고, 누구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겠지만 그곳에 서면 어느 쪽도 밤이라고, 혹은 낮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 앞에서 읽어도 마찬가지, 뒤에서 읽어도 마찬가지. 내가 당신이라고 해도, 당신이 나라고 해도 마찬가지. 이 삶이 시작된대도, 끝난다 해도 마찬가지. 커다란 순환과 어느 곳도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원형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아마도 '진정한 당신'을 만나야지만 알 수 있지 않을까. 오토와 아나는 그래도 이 생에서 그 의미를 알고 갔으니, 이제 다음 생에서는 환하게 떠오를 일만 남았겠지.
추신 : 이 글을 끝낼 즈음 마침 이상은 씨의 '어기여디어라'가 랜덤 재생으로 맞춰둔 오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본문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이 영화의 영상이라든가 음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북극의 설원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순록의 눈동자를 떠올려보라고 말하고 싶다.
2013. 11. 11.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