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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ug 01. 2015

와니와 준하 / 와니와 우리들의 시간

김용균 <와니와 준하>



와니와 우리들의 시간 


처음 <와니와 준하>를, 조그만 자취방에서 10인치의 노트북 모니터로 보던 때가 언제였지? 하고 문득 떠올려본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가뜩이나 빛이 잘 들지 않는 방은 더욱 캄캄했다. 눅눅한 습기가 방 안에 자욱했고,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늘 사랑하는 사람과 영화에서처럼 동거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부러워했었다. 그때 아마 나는 짝사랑에 빠져 있거나,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상태였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우산을 쓰고 영화 속의 공간과 닮아 있는 제기동 골목길을 하염없이 걸었던 것 같다. 빗소리는 투명했고, 나는 세상의 투명인간이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며 처음 마음에 품은 것대로 이루고 사는 게 얼마나 될까 싶었다. 어린 날의 사랑과 꿈. 두 가지는 내 마음의 중심에서 멀리 물러나 외곽에 놓여 있었다. 허나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저절로 벼랑 끝에서 떨어져버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무심한 처사였다. 그날은 한참 동안 비를 맞으며 찰박찰박 소리를 빈 거리에 퍼뜨리며 동네를 걸어 다녔었다. 


추억은 마음 어딘가에 그림처럼 걸려 있다


내게 <와니와 준하>는 어떤 대사나 이야기, 장면, 인물들의 표정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공기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소개할 때는 항상 모 씨에프 광고를 하는 사장님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 참 좋은데, 참 좋은데 뭐라 말할 방법이 없네. 처음 영화를 본 날로부터 10년 정도가 흐른 최근 다시 영화를 봤다. 10년 동안 살림살이가 상당히 나아진 덕분에 커다란 100인치 스크린에다 프로젝터 빔을 쏴서 보았다. 아, 이런 영화였던가. 이렇게 영상이, 인물들의 표정이, 말들이, 소리들이 좋은 영화였구나. 마치 전혀 다른 영화를 처음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들이 영상이나 소리가 아닌 이미지와 감상으로만 남아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 영화들을 모두 10인치의 조그만 노트북으로 본 탓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의 김희선은 드라마의 김희선과 전혀 다른 표정과 연기를 보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내가 좋아하는 새벽의 빛이었다. 맞아, 이 영화의 연기를 보고 김희선 씨가 사실은 굉장한 배우라고 생각하게 됐었지. 김희선은 영화 운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카라>, <비천무>, <자귀모> 등등 화제를 모은 영화들에 출연했지만 다들 흥행에 부진했고, 연기력에 대한 혹평도 이어졌었다. <와니와 준하>는 다르다. 이 영화에서의 김희선이 연기한 '와니'는 '진짜'라는 느낌을 준다. 와니와 준하의 시선을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시종 와니라는 인물이 영화를 지배한다. 김희선이 뿜어내는 서늘한 감정의 힘이 스크린 밖까지 고스란히 퍼져나온다. 그 힘은 영화가 끝난 뒤까지 남아 나를 비 오는 거리로 떠밀었던 것이다. 


'와니'라는 인생 최고의 캐릭터를 연기한 김희선은 영화 속에서 처연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와니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했다. 어쩌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 명확히 알고 있다. 와니는 자신의 사랑을 밀어붙인 탓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이제 와니는 안전한 사랑을, 일정한 감정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 수준에서 유지하려 하는 사람이 되었다. '적당한 사랑'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릴 적에는 '적당한 사랑', '적당한 꿈'이라는 표현을 떠올리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이고, 꿈은 꿈일 뿐이었다. '적당한'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것은, 적당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물론, 적당하다는 것이 균형을 잡아가는 것임을, 소망과 현실 사이의 조화를 찾아가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하나씩은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심연에 남겨져 무한한 중력을 형성하는 기억이, 감각이 있다. 오래전 와니가 퍼뜨린 새벽 빛이 내 마음에 아로새겨져 다시 <와니와 준하>를 보게 만든 것처럼.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의 벤치 위에 앉아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은 대체 어느 시점일까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옛 기억에 붙들려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거나 불안을 떠올린다는 점에서 미래를 앞당겨 살아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또 지금의 빛, 지금의 소리, 지금의 감촉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정말로 그저 현재의 인간일까. <와니와 준하> 속 와니는 과거의 인간이었다. 준하는 다분히 현재적 인간이다. 아니, 어쩌면 준하 역시 유년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인간이기도 하다. 그 점이 와니와 준하를 연결해준 것이었을까. 과거적 인간 와니는 현재적 인간 준하를 만나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한다. 허나, 그들이 앞으로 함께 같은 미래를 떠올릴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참 적당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 지금 진한 새벽 빛이 창으로 스며들고 있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다시. 


2015. 5. 1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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