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진 Oct 02. 2021

신 에반게리온 : 다카포 / 인류보완계획 다음의 세계

안노 히데아키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다카포>


우리는 ‘인류보완계획’ 다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가끔 생각한다. ‘인류보완계획’이란 20세기가 끝날 무렵 등장해 10대와 2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생명체의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통합해 인류를 신 이상의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 바로 ‘인류보완계획’이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가 아버지 ‘이카리 겐도’의 인류보완계획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큰 줄기지만, 이렇게만 서술하면 이 만화의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표면적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소년 로봇 만화의 플롯을 지니고 있지만, 감독 안노 히데아키의 관심은 ‘사람은 무엇으로 구원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미 20세기 말에 결론을 내렸던 에반게리온의 결론을 21세기에도 지우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신지와 겐도, 20세기와 21세기의 인류를 각기 상징하는 두 사람


오늘 새벽에 그가 마지막으로 쓴 신극장판 최종편의 결말을 보았다. 그의 청춘도, 나의 청춘도 다 지나갔다. 우리는 이미 소녀소년의 세계가 아닌, 어른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인류의 구원 같은 거창한 목표를 내걸었던 어른들의 진짜 마음은 아주 작은 위로와 용서를 바랐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을 혁명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로 옆에 있는 이에게 용기를 내어 손을 뻗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속의 남자들은 그걸 못해서, 세계 정복 따위의 엉뚱한 야망을 품고 세상을 혼돈에 빠뜨려 왔다.


남자들이 망가뜨린 세상의 상처를 꿰매온 것은 여자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남자’, ‘여자’라는 것은 생물학적 규정이 아니다. 오랜 세월 남성의 가치로 숭상되어온 일련의 속성들, 여성의 가치로 여겨져온 속성들의 젠더적 규정이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생물학적 남성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한 아니마(여성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주요 여성캐릭터인 아스카는 일그러진 세상에 맞서 무작정 달려나가는 아니무스(남성성) 일변도의 인물이다. 안노 히데야키는 아니마적 이카리 신지를 조금 더 아니무스의 세계로 걸어가게 하고, 아니무스적인 아스카는 조금 더 아니마의 세계로 인도한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견고한 정체성의 벽을 넘어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중화를 통해, 우리 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인류보완’은 외부가 아닌 우리 내면에서 발생한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두 히로인은 각기 다른 색이었던 파일럿 수트 대신에 '시작'을 의미하는 순백, 그리고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무늬가 그려진 공통의 파일럿 수트를 입는다


평행우주 이론이 사실이라면, 1999년이나 2000년 즈음 어딘가의 평행세계에서는 서드임팩트 또는 포스임팩트가 발발해 ‘인류보완계획’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옛 추억을 꺼내 중2병적 상상력을 더하자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카리 신지가 인류를 구원했고, 우리는 ‘인류보완계획’의 기억을 송두리째 삭제 당한 채로 그 다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가을의 파란 하늘과 서늘한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좋아했던 작품의 최종 결론을 지켜보고 난 뒤, 나를 찾아온 첫 감정은 결국 ‘외로움’이었다. 머리를 기대고, 손을 잡아 체온을 나누고, 오늘 하루는 어땠어? 하며 안부를 묻고, 고마웠어 라고 마음을 전하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작지만 위대한 일들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순간들이 삶을 이끈다. 역사에 기록되는 이례적인 일들은 인류가 크게 허탕친 일들뿐이다. 나는 내 용기를 지금 어디에 쓰고 있나… 아스라이 높아진 가을하늘에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들이 “너 뭐하냐?” 묻고 있는 듯하다. 나의 이 손을 이제 어디로 뻗어야 할까.


2021. 10. 2. 멀고느린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