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츠미 유키히코 <연애사진>
이따금 오래 전의 영화를 다시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내게는 여전히 어제의 일 같은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시간들이 열화된 사진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1997년의 내가 부산 남포동의 낡은 극장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홀로 보던 때의 느낌과 같다. HD의 추억들은 SD의 화질로 세상에 남아, 청춘과의 거리감을 새삼 자각하게 만든다. 내 영혼은 여전히 10대, 20대의 나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에, 두근거리고 반짝이던 순간들을 과거로만 여기는 일은 낯설다.
어제 다시 본 <연애사진>은 세기말 일본의 아이콘이었던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로, 당시 대히트를 했던 것과 무관하게 지금은 대담한 B급 영화처럼 보인다. 사진작가 라는 공동의 꿈을 꾸었던 시즈루(히로스에 료코)와 마코토(마츠다 류헤이). 두 청춘은 연인이었다. 하지만 사진에 더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시즈루를 마코토가 시기하기 시작하며,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진다. 흔한 사랑이야기다. 그렇기에 내 지난 사랑의 한 단편도 그 이야기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욕망에 비해 가지고 있는 것이 한참 부족한 인간이었기에, 늘 나를 추월해 가는 이들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해하고, 용서하며, 더 조금 더 넓고 깊게 사랑하고 싶은 의지는 늘 자격지심의 작은 바늘에 뻥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내 청춘의 8할은 후회였다.
영화 속 남주인공 마코토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시즈루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망설임 없는 도전은 청춘의 자질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20대에 훨씬 더 주저하고 망설이고, 쉽게 포기해버렸다. 사람들은 늘 뒷걸음치고 회피하며, 꿈이 아닌 현실을 택하여 왔으면서도,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으니까” 라고 읊조린다. 89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두 발로 시대의 광장에 서서 미현실의 장대한 꿈을 외친 고 백기완 선생님의 삶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스스로 시즈루보다 뒤쳐진다고 여겼던 마코토는 결국 뉴욕의 거리에서 시즈루를 발견하고, 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계승한다. 그리하여 시즈루와 마코토의 사랑은 영원에 거한다. 꿈과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참된 꿈은 사랑을 품고, 깊은 사랑은 꿈을 품는 것이다. 비록, 지난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지만.
‘영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심연으로부터 눈물이 울컥 솟구친다. 영화 초반 20대의 히로스에 료코가 남주인공을 향해 SD화질의 귤을 던지는 장면에서 나는 울어버렸다. 내게도 까마득한 영원이 된 장면들이 있다. 언젠가의 당신, 봄날의 미소, 여름의 목소리, 활짝 편 가을의 손가락, 흩날리는 몇 가닥의 겨울 머리칼들, 그러한 ‘원더’의 컷들은 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의 기억은 우리의 뇌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밤과 낮 속에 저장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불현듯 태양 아래서 눈을 감으면 다시 HD 화질의 귤이 되어 눈 앞에 점, 점, 날아오는 것이다.
2021. 2. 21.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