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형 <윤희에게>
흘러간 사랑은 모두 비밀이 된다. 두 사람의 우주 속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더러 폭죽을 터뜨리기도 했을 마음들은 사랑의 계약이 끝난 뒤에는 텅빈 무대와 함께 통째로 비밀의 방 속에 갇힌다. 종종 우리는 그 비밀의 방을 열어 옛 무대 위를 걸으며 흩어진 사랑의 기억들을 주워 모으기도 한다. 그러면 마치 오래 전의 그날로 돌아가 바람을 맞고, 파도 소리를 듣고, 당신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황홀경에 빠져든다. 기형도 시인의 싯구처럼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빈집에 갇히고 싶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 문을 나와 다시 공공연한 하루를 살아가야만 한다.
며칠 전 비가 내리던 날 밤, 영화 <윤희에게>를 다락방의 회색 소파에 기대어 보았다. 훗카이도의 오타루는 한국에 사는 윤희에게 멀리 있는 비밀의 방이었다. 비밀의 방에는 윤희를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쥰이 살고 있다. 쥰의 고모 마사코와 윤희의 딸 새봄이 뜻하지 않게 비밀의 문을 열어버린다. 윤희는 오타루의 설경 속을 자박자박 걸으며 가까이 있지만 아득한 시공 속의 사랑을 그리워 한다. 사랑의 기억이란 바로 앞에 있지만 손에 쥐면 사라지고 마는 눈과 같은 물질이어서, 우리는 단지 바라보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 하염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이 영원히 아름답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사랑이란 얼마나 쓸쓸한가.
사랑이란 얼마나 눈부신가.
어떤 사랑은 비밀이 된 후, 사랑의 당사자들에게서 조차 잊혀져 우주의 미아가 되고, 어떤 사랑은 때때로 쓸고 닦아 오래 방의 형태를 유지한다. 내게도 이따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는 먼지가 쌓인 비밀의 방이 있다. 기분이 내키는 날에는 빗자루를 들고 들어가 바닥에 쌓인 먼지를 쓸어낸다. 창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한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방의 물건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비밀의 방 속에서도 비밀들이 생겨난다. 나조차 모르는.
이제 갓 생겨난 비밀의 방에는 물건들이 아주 많다. 나는 그것들의 위치와 이름을 하나 하나 아로새긴다. 절대로 잊지 않겠어. 영원히 기억하겠어. 라고 되뇌이며 빈 벽에 기대어 있고는 한다. 물론, 수년 전에도 비슷한 다짐을 했던 방이 있었다.
사랑이란 얼마나 쓸쓸한가. 그리 생각하다가도 <윤희에게>를 보며 또 잠시 떠올렸다. 사랑이란 얼마나 눈부신가. 윤희가 홀로 거닐던 새하얀 오타루의 아침. 그리고 쥰과 마주한 캄캄한 밤의 풍경. 그 백과 흑 사이에 아무런 말이 없어 좋았다. 윤희가 쥰에게, 쥰이 윤희에게 건넬 수십 년의 언어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 속에 이미 쓰여져 있을 것이다. 삶에는 다른 모든 날들과 다른 하루가 존재한다. 그 하루는 대단한 중력으로 삶의 모든 순간들을 끌어당긴다. 윤희와 쥰에게 생겨난 또 한 번의 다른 하루는 두 사람을 어디로 이끌어 갈까. 그건 그 둘만의 새로운 비밀이 되겠지. 아름답게도.
2020. 3. 11.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