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 1

연작 SF. '바이 바이 메모리얼' Code 1

by 장명진

“눈이라구?”


케이시는 이-노트(E-Note)에서 눈이라는 물질을 출력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맞아. 지구에서는 예전에 겨울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솜뭉치 같은 게 있었지. 아쉽게도 화성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화성에 건설된 이 스페이스 네이션 ‘지구의 추억’ 은 지구와 비슷한 형상으로 제작되었지만 계절의 변화까지 기대할 순 없는 것이다. 덕분에 이곳은 세월에 관계없이 늘 초여름 같이 따사롭다.


“이런 거 보면 가끔씩 지구가 그립지 않아 클레어?”

“글쎄... 그리운가?”

“넌 여전히 낭만이 없구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움 따위 별 필요 없는 감정이지 않은가. 왜들 그렇게 소모적인 것에 신경 쓰는지. 그리움 같은 게 아니라도 생각해야 될 게 많다. 일단 스팸메일처럼 우르르 쌓인 결제 파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나는 가정용 청소로봇을 개발하는 주식회사 ‘클리어’의 홍보부 부장으로 있다. 물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이 회상에 입사했다. 사실은 아무 생각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취직한 것은 다행이다. 지구 붕괴 직전에 화성에 사옥과 공장을 지은 얼마 되지 않은 기업 중의 하나이니까. 갑작스러운 지구의 붕괴로 인해 이곳 화성으로 이주해 살던 인류와 관광객들만이 생존하는 행운을 얻었다. 아, 지구의 높으신 정치 리더들도 우주선을 타고 탈출했음은 당연하다. 어쨌든 나는 여러 가지로 행운아다. 이렇게 살아남았고, 이렇게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이렇게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행운을 모르고 불평을 늘어놓는 인간들은 정말이지 역겹다.


‘클리어봇 XP-10 모델. 방바닥에 바퀴벌레가 남긴 쿼크의 흔적까지 쓸어버린다! -보낸 이. 케이시-’


삭제. 불평을 늘어놓는 인간들 중 쓸만한 머리를 가진 인간을 본 적이 없다.


이제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였다. 모니터 속에서 흘러나오는 완전 붕괴된 줄 알았던 지구가 서서히 재생하고 있다는 앵커의 하드보일드한 목소리. 희망은 아주 지겨운 것인가 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는 이들도 지겨운 건 마찬가지. 이 유리관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않겠는가. 이루지 못할 꿈 따위 빨리 접어버리는 게 낫다.


“에스프레소.”


나는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뽑았다. 혀끝부터 감겨들어오는 지독한 쓴 맛. 지구에서 대학을 다닐 때 유서 깊다는 커피 하우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공정을 기계 없이 손으로 처리했다. 그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나온 커피는 무던히도 들이켰었다. 지독한 쓴맛. 그때는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는 작자들은 정말 지독한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30대 후반이 되면 누구나 지독해진다는 걸 몰랐다.


얼마 전까지 환했던 밖이 어두워졌다. ‘지구의 추억’ 중앙 조명이 꺼진 것이다. 야행성인 인간들은 드라이브를 즐기거나 클럽에 갈 것이고, 나 같이 규칙적인 아침형 인간은 일찍 자야 한다.


“오프.”


방 안의 불이 꺼졌다. 말하기가 귀찮은 나 같은 인간들에게 가장 짜증 나는 것이 있었다. 모든 가전제품들이 음성인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편리함은 결코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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