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난 무릎, 운디드니 이야기
"백인에게는 딱 두 종류의 인디언만이 존재하네. 술 취한 건달과 현명한 인디언이지. 옛날에 우리는 야만인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런 사람은 다 사라지고 없네. 이제는 술꾼과 현명한 인디언뿐일세. 나는 백인이 우리를 술꾼으로 여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네. 그러면 최소한 우리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니 말일세.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눈에 보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그러다 술꾼이 아닌 인디언을 만나면 그들은 어떻게든 그 상황을 처리해야만 하네. 모든 인디언을 현자로만 보는 사람은 인디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네. 단지 인디언의 생각에만 관심이 있지. 그건 우리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하고 인디언을 백인의 필요에만 부응하는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일세.
인디언처럼 되는 방법을 알고 싶나? 대지와 가깝게 생활하게. 몇 가지 소유물을 없애버리고 서로 도우며 살게. 조물주에게 말을 건네고 가능하면 더 조용히 살아야 하네. 땅 위에 쉴 새 없이 무언가를 건설하는 대신 땅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일세.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누군가를 그들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려 하지 말게. 됐네.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네."
- 켄트 너번 <상처 난 무릎, 운디드니> 228p
난 운디드니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냥 미국에 의해 라코타 부족 수 백 명이 학살을 당한 슬픔의 땅이라고 기억했다. 그러던 중 영풍문고에서 우연히 <상처 난 무릎, 운디드니>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상처 난 무릎. 아하, 그렇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표지에 있는 그윽한 눈빛의 거북섬 원주민 할아버지도 인상적이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다소 고생하겠구나 싶었지만 흔쾌히 책을 구입했다.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인 켄트 너번이 거북섬 원주민 댄 노인의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켄트가 쓴 인디언 관련 책들을 본 댄 노인이 자신의 자서전을 써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켄트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댄 노인의 마을을 찾아간다. 댄 노인이 사는 인디언 보호구역은 퇴락한 할렘 거리보다 못한 곳이다. 온갖 고철들이 나뒹굴고, 낡아서 쓰러져 가는 집들이 서있는 황량한 곳이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땅으로부터 쫓겨난 거북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켄트는 댄 노인과 댄 노인의 손녀 위노나, 그리고 대머리 인디언인 그로버 등과 만난다.
* 나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을 거북섬 원주민이라는 나만의 조어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아메리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이미 식민지 이후의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민족을 '대일본제국 원주민'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떨까? '거북섬'은 전통적으로 미국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이 자신의 대륙을 지칭하던 말이다.
처음 댄 노인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자기 부족의 역사와 가르침들을 메모해두었던 종이 조각들을 켄트에게 건네며 자서전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곧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일임을 깨닫고 평생에 걸쳐 쓴 그 메모들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자서전을 쓰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댄 노인은 메모들을 짜깁기 해서 자서전을 쓰는 대신 켄트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는 그로버도 함께이다. 댄 노인과 켄트, 그로버는 여행 중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거북섬 원주민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상처받은 무릎, 운디드니에 도착한 댄 노인 일행은 무관심 속에 방치된 라코타 부족민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하고 다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돌아온다.
이상이 이 기나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대단한 플롯도 없고,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나, 충격적인 살인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댄 노인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현대 백인의 모습,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의 백인들이 무기를 들고 거북섬 원주민들을 직접적으로 학살했다면, 20세기 후반부터 지금 21세기의 문명인들은 책을 들고 거북섬 원주민들을 간접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시중에 나오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죽은 인디언에 관한 책들이다. 그 제목도 최후의 인디언이니, 인디언 멸망사니, 사라진 인디언이니 하는 식이다. 그 제목들만 보면 마치 이 지구 상에서 더 이상 거북섬 원주민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뭔가 신비로운 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런 죽은 인디언들에 관한 책을 읽고 난 뒤, 길거리에서 파는 깃털 장식이나, 원주민 풍의 목걸이 등을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인디언이 된 것처럼 여기고, 인디언의 행동방식(자기가 그렇게 믿는)을 따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닐지도 모른다. 자신은 인디언을 사랑하며, 인디언처럼 살고 싶다고. 그는 인디언을 단 한 번도 만나본적도 없으면서 마치 인디언들과 한 생을 살아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에 인디언! 인디언! 하면서 소란을 피우고 다니겠지.
오, 이런. 진짜 거북섬 원주민들은 ‘인디언’이라는 말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인디언을 사랑한다니.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정말 예의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말 절친한 일본인 친구에게 ‘쪽바리’라고 부르는 미치광이일 것이다. 존경하는 중국의 공자님에게는 “오 위대한 뙤놈이시여!”라고 소리칠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면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모두 그렇게 부르니까, 그게 더 익숙하니까란 변명을 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고 본다. 인디언이라고 써야지만 책이 팔린다고.
과거의 백인들과 백인들과 똑같아지고 싶어 한 한국인들은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바바바바!’ 소리를 내는 거북섬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그들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실은 해안지방에서 고기를 낚으며 사는 부족의 옷을 입은 사람이 대평원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녀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모든 인디언은 똑같이 문명의 축복을 거부한 야만적인 원시인이었을 뿐이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명인들의 잘못으로 지구가 병들게 되자 그들은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지구의 역사에서 자신들처럼 지구를 괴롭힌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 새롭게 지구를 지키고 치료하려는 일을 하려는 자신들에게도 명분이 주어질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죽은 인디언들을 되살려내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야만인의 누명을 벗기고, 현자와 지구 지킴이로서의 명예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영화도, 어느 책도 거북섬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단한 현자들이었으며, 지구를 지켜낸 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그런 고백서들을 읽으며 문명인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그리고 죽은 인디언의 용기와 현명함에 감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북섬 원주민을 놀림감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 그런데 왜 거북섬 원주민들은 아직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일까. 60년대에 죽은 인디언에게 감명받아 커다랗게 일어났던 히피 운동은 대체 무엇을 이룩하고 사라져간 것일까. 왜 거북섬 원주민들은 아직도 그 거대한 감옥에 갇혀 배고파하고 있는 것일까. 왜 아직도 거북섬 원주민 젊은이들은 미래를 잃고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거북섬 원주민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세계 방방 곳곳에 그렇게도 많은데 말이다.
- 2화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