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커포티 <티파니에서 아침을>
어린 시절, 토요일 밤은 항상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토요 명화극장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토요 명화극장에서는 2주 연속으로 '로마의 휴일'과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방영해주었다. 영화의 내용은 이제 가물가물해지고 말았지만 흑백 화면과 오래된 뉴욕의 거리를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생생히 기억한다.
솔직해지기로 하자. 홀리 골라이틀리가 영미 문학사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 중 하나인 줄도, 심지어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원작 소설을 둔 작품인지 전혀 몰랐다. 당연히 트루먼 커포티라는 작가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적어도 중등 시절 내가 독후감을 쓸 때 줄거리를 베껴쓰기 위해 즐겨보던 백과사전 속에는 트루먼 커포티라는 이름은 없었다.
최근 20만 원어치나 생긴 문화상품권을 흥청망청 소비하기 위해 들른 종로 영풍문고에서 알록달록 내 맘에 쏙 드는 표지를 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는 합격. 영화배우를 표지 모델로 썼나 했더니 글을 쓴 작가란다. 작가 얼굴도 합격. 어, 그런데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 영화를 소설화한 걸까.
선집을 이리저리 들춰본 이후에야 트루먼 커포티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에 버금가는 영미권의 대소설가이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페이보릿 목록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줄 책 한 권과 내가 볼 책 한 권. 그렇게 <티파니에서 아침을> 두 권을 사서 서점을 나섰다.
내가 기억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말괄량이 숙녀와 점잖은 신사의 로맨스물이었다. 최근 고장 난 맥북 탓에 로맨스 드라마를 오래 못 보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다른 책들을 제쳐 두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읽기 시작했다. 아, 20세기에 쓰인 영미 문학이 이렇게 재밌었던가. 책을 끊어 읽는 습관이 있는 나였지만 단숨에 끝 페이지까지 읽어내려가게 되었다.
홀리 골라이틀리는 과연 영미문학의 매력녀 2위에 랭크된 것이 과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거침없는 자유, 어둠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빛. 그녀의 이름(Holy go-lightly)처럼 그녀는 성스럽고 가볍게 떠나며, 빛난다. 당대의 미국 사회를 떠다니던 허영과 거품 경제 뒤의 그늘들, 그리고 남자들의 욕망을 정면으로 관통하며 '개인의 자유로움'을, 완전한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여행에 나서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놓쳐버린 자유미합중국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지 않았을까.
청교도들은 교황청의 억압을 피해, 노동자와 노예들은 보다 나은 조건의 삶과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완전한 자유를 향해 떠나는 여행은 정말 '자유'를 위한 여행일까. 질문을 바꿔, '완전한 자유'라는 것은 가능한 말일까. 자유는 구속의 상태에 저항할 때 생겨나는 말이다. 자유라는 말은 근원적으로 저항의 언어이며,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어지거나 저항할 힘을 잃는 순간 자유는 가치를 상실한다. 인간은 자유를 갈구하는 한 편, 그 이면에서 동시에 안정을 갈망한다. 안정은 일정한 구속을 필요로 한다. 자유와 구속은 이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에 기대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을 동경하지만 영원한 방랑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홀리 골라이틀리를 동경했던 고리타분한 남자들이 그녀의 자유를 방종과 방탕, 그리고 방황으로 재인식하고 자기들이 구속당할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작품 속 주인공은 끝까지 그녀의 자유를 지켜본다. 아마도 그만은 끝끝내 안정적인 삶을 획득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안정적인 미래를 세팅하기 위해 지독히도 계획적으로 삶을 설계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방탕하게 내버려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에는 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아지는 것 같지만...
영화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도발적인 소설 속의 홀리 골라이틀리 양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삶을 돌아본다. 나는 충분한 여행을 떠나보았는가. 아니면, 언제든 떠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나는 벌써부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살고 있지는 않나. 고작 30여 년 정도 쌓아 올린 탑을 쓰러뜨리지 않기 위해 남은 40여 년을 살 것인가.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이 거침없는 여주인공의 돌직구에 진심으로 응답해야만 할 것 같다.
* 이 글을 쓴 다음 해 나는 교사직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 속으로 모험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