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진 Apr 28. 2016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 사랑은 상대를 존경하고

정현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사랑은 상대를 존경하고 시간을 견디는 것


두 사람은 교정의 비탈길을 걸어 오르며 사랑에 대해 서로에게 물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 쪽이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그남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빠졌다. 


너는?


시간을 벌기 위한 물음이었다. 


음... 글쎄. 네 얘기부터 듣고 싶은데. 

그래? 뭐랄까... 그래, 그런 것 같아. 시간을 견디는 것?

시간을 견디는 것?

응. 사랑이라는 건 그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는 마음인가. 진짜 사랑이라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바래지지 않는 그런 거 아닐까. 

음... 시간을 견디는 거라...


그녀는 자신의 몸을 향해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비탈 위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았다. 그남은 그녀가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남의 표정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남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답을 생각해내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비탈길을 다 오른 후에도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어둠이 내린 교정을 천천히 걸었다. 그남은 10년 전 그녀와 교정을 걷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기억은 봄의 것이었다. 기억을 떠올리자 어둠이 내린 교정에 햇살이 비치고, 빈 가지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사랑스런 추억'이었다. 그남은 윤동주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햇살이 비치고 벚꽃이  만개한 거리에는 그녀를 사랑했던 그남의 젊음이 오래 남아 있었다. 그남은 그 젊음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남에게 사랑은 이십 대의 모든 것이었고, 꿈이었으며, 로맨스였다. 그남은 그가 청춘을 통해 기대한 모든 것들을 '사랑'에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남의 사랑은 그 자신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생각났어?


교정을 돌아 나오며 그남이 물었다. 이번에는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뭐가?

아까 그 질문 말야. 너도 대답해야지.

아아.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상대를 존경해야 하는 것 같아. 

존경?

응, 상대를 존경해야지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뭐랄까 그 사람의 인생, 인격 이런 것을 전체적으로 존경하는 거 말야. 그런데 내가 존경했던 사람은 나를 별로 존경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아니 점점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하겠지. 

으음... 존경하는 것이라... 그것도 맞는 말 같다. 


그남은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존경. 그녀는 그남의 말을 생각했다. 시간. 두 사람은 비탈길을 내려와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지하철역에서 둘은 서로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이후 그남은 처음으로 존경에 대해 생각했고, 그녀는 시간에 대해 오래 질문했으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파리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읽고 고작 오래 전의 하루를 생각했을 뿐이다. 화가 김환기와 문필가 김향안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하고, 시간을 견디는 사랑을 했다. 아, 우리는 사랑의 답을 절반씩 알고 있었다. 다만 실천하지 못했거나, 상대에게 실천할 마음이 없었을 뿐. 변명이 생기는 것은 아마도 오래갈 사랑이 아닐 것이다. 


인연의 사람, 연인. 김환기, 김향안


저자 정현주 씨는 김환기와 김향안 두 부부의 족적을 따라 파리를 걸으며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 아름답게 지속된 것은 '지성'의 힘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그가 재구성한 사랑의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니 '지성'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감성'이 더욱 선연히 눈앞에 그려진다. 환기는 향안을 향해, 향안은 환기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어느 엄혹한 시대에도, 쓸쓸한 나라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면 마음에 한 송이 꽃이 핀다. 


어쩐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건 사람이 정하는 일은 아닌 것만 같다. 그러니 다만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사람의 일은 거기까지. 견디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시간의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