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달의 바다>
매력적인 제목, 아름다운 표지 일러스트. <달의 바다>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어서 한 번에 내 눈길을 끌었다. <달의 바다>를 쓴 정한아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책이 나오기 이전의 일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할 시기였다. 나는 대산대학생문학상에 원고를 내보려고 지난 수상작들을 살펴보다가 '나를 위해 웃다'라는 단편을 읽고 놀랐었다. 그 작품은 담백함, 참신함, 메시지를 두루 갖춘 수작이었다. 그 단편으로 대산대학생문학상을 수상한 이가 바로 정한아 소설가였다. 비슷한 또래로 대산대학생문학상을 수상한 것만으로도 질투가 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장편으로 문학동네작가상까지 따버리다니. 나는 속으로 음험한 음모론까지 구상해보기도 하였다. '문장 라디오'라는 방송을 통해 <달의 바다>를 2주일 동안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좀 너무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당한 질투와 약간의 조소를 마음에 품은 채 <달의 바다>를 펼쳤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대뜸 삶의 한 복판을 찌르는 질문과 즉각적인 대답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무척 매력적인 도입이었다. <달의 바다>는 크게 우주비행사가 된(?) 순이 고모의 편지와 주인공 은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우주와 지구라는 두 의미심장한 공간. 그 두 공간은 어쩌면 꿈과 현실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남루한 지구의 삶에서 벗어나 꿈의 우주로 떠난 순이 고모. 어릴 적 순이 고모로부터 힘을 얻고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은미. 그 은미가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혀 좌절을 거듭하고 결국 자살기도를 하려다 엉뚱하게 할머니의 등살에 휩쓸려 순이 고모를 찾아 나선다. 순이 고모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는 은미의 곁에는 은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민이가 있다. 민이는 남자지만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받고 싶어 한다. 지구 별에서 방황하는 두 젊은이는 꿈을 찾아 우주로 날아갈 수 있을까.
<달의 바다>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제목 그 자체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그 힘이다. '달'이라는 존재의 순결함, 바다라는 존재의 넉넉함. <달의 바다>는 시종 따뜻한 문체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감싼다. 어떻게 보면 <달의 바다>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따스한 여성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꿈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순이 이모나, 순이 이모에 대한 사랑을 지키며 사는 할머니, 은미와 민이 사이의 자매애, 순이 이모와 그의 친구 레이첼 간의 우정. 할아버지나 순이 이모의 전 남편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세계에 대하여 <달의 바다>의 여성들은 따뜻한 연대를 통해 그들만의 아름다운 '달의 바다'를 만들어 간다.
달의 바다란 사실 춥고 어두우며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불과하다. 허나 '달의 바다'라고 발화했을 때 우리들 가슴에는 따뜻한 달빛 물결이 밀려들지 않는가. 어쩐지 그곳에 가면 모든 게 용서되고 이해될 수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삶은 거짓과 사실의 대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삶이 과연 사실만으로 지탱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토끼가 살고 있을 듯한 '달'을 내버리고, 온전히 찬 돌덩어리 별로서의 '달'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별로 그 삶이 즐거울 것 같지 않다. 사실, 이 지구에 태어나는 모든 존재가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거짓에 가깝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일부다. 허나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건, 우리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거짓인 것이다. 어쩌면 사실보다는 거짓이 우리를 살아가게, 살아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달의 바다>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래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 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
- 정한아 <달의 바다> 160~161p 중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은 너무 똑똑한 나머지 세계의 거짓을 미리 알아버렸다. 그리고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해 다들 사실을 붙든다. 이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거짓에 눈을 주지 않는다. 자기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사실만을 잡으려 분주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꿈을 반드시 이루기 위해 가슴에 품지는 않았다는 것을. 달은 그 누구도 두 손에 꽉 움켜쥘 수 없다. 하지만 달은 늘 거기에 있다. 늘 거기에서 지구의 밤을 밝힌다. 달이 없으면 숲에서 길을 잃는다.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이 숲에서 길을 잃어 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달이 없으니까.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어둠을 밝혀줄 꿈이라는 거짓이 없으니까.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어쩌면 꿈은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 그곳을 향해 길을 걷기 위해, 신산한 삶의 사실을 따스하게 비추기 위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꿈에 온전히 다다르지 못하면 또 어떤가. 자신이 꿈꾸며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의 웃음들은 영영 남을 것을. 꿈에 다다르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 오래오래 곁에서 빛날 것을. 나 역시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이라는 거짓에 즐겁게 속아준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꿈을 반드시 이루기 위해 가슴에 품지는 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