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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18. 2016

남성 동지 여러분,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지금은 21세기이니까요> 매거진을 발간하며


2016년 5월 18일 오늘, 강남역 10번 출구에 헌화하는 내 어머니뻘 여성


남성 동지 여러분,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작년에 캐나다의 신임 총리가 된 40대의 젊은 남성 쥐스탱 트뤼도는 새로운 정부의 내각 비율을 양성이 동등하도록 구성해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왜 내각을 그렇게 구성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해서 박수를 받았죠.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2015년입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21세기다운 새로운 문화,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를 기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트뤼도 총리는 21세기 다움의 한 요소로 양성평등의 문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의 지위가 제자리를 찾아 남성과 동등해지는 문화를 꼽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얼마 전 20대 총선에서 여성은 51명이 당선되어 전체의 26.5%를 차지했습니다. 대한민구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그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은 그 절반을 가까스로 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대기업 임원 중 여성의 비율은 2.2%입니다.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는 13년째 OECD 가입국 중 1위입니다. 통계조사 결과 한국 남성이 100을 받을 때, 여성은 63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질적 격차 외에도 우리나라의 여성은 데이트를 하다가 살해당하고, 여행을 떠났다가 살해당하고, 집으로 귀가하다가 살해당하고, 화장실을 가려다가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방법도 다양합니다. 난도질을 하기도 하고, 신체를 반으로 절단하기도 하고, 갈아버리기도 하고, 둔기로 후려치기도 하며, 주먹으로 폭행을 당해 죽기도 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한 해에 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보도가 된 2015년 1월 ~ 8월 사이의 강력범죄 통계에 따르면 피해자의 87%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7개월 동안 약 1만 3천 건의 강력범죄가 여성을 대상으로 발생했습니다. (이 범죄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증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통계


그런데 참 억울하죠? 몇몇 언론과 남성들은 그리고 일부 여성들까지도 오늘날이 '여성 상위 시대'라고 말합니다. 어떤 통계 수치에 의해 여성 상위입니까? 어떤 실질적 현상에 의해 상위입니까? 어떤 문화적 분위기에 의해 상위입니까? 우리가 '여성 상위 시대'라고 이 시대를 규정하려면 위의 질문에 어느 하나라도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성 상위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소문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10여 년째 이 나라를 떠돌고 있는 유언비어입니다.


남성 동지 여러분,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적어도 제가 소년 시절 꿈꾸었던 21세기는 약한 자가 단지 약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죽임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는 미래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별, 신분, 직업, 경제력, 인종, 종교 등 모든 개인적 차이를 넘어 자유와 인권을 동등하게 누리며 사는 세상. 그것이 제가 그리던 미래였습니다.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21세기라니요. 여러분은 이런 21세기를 상상하셨습니까? 저는 이런 21세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의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성 상위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소문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10년째 이 나라를 떠돌고 있는 유언비어입니다.

바로 어제 또 한 명의 20대 여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미친놈이 아니다. 나를 그런 놈과 왜 동일시하느냐. 억울하시죠? 나는 안 그런데, 나는 좋은 남자인데 왜 나까지 나쁜 놈 취급을 해?! 화가 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어떡합니까. 대한민국 여성들이 무슨 좋은 남성 감별사입니까. 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남자 중에 누가 나를 해칠 남자이고, 해치지 않을 남자인지 어떻게 압니까?


공포는 모르는 것에서 옵니다. 누가 나를 해칠지 알 수 없을 때 공포는 극한에 달합니다. 더구나 이 공포는 '죽음의 공포'입니다. 만약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이 나라에 외계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우리 남성보다 키도 훨씬 크고 힘도 압도적입니다. 머리도 좋지요. 그런데 그 외계인 중의 한 사람이 어느 날 "지구인 남자들은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나를 무시해"라고 하며 지하철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지구인 남성을 살해했습니다. 어느 날은 한 남성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로 강에서 발견됩니다. 그 역시 외계인의 소행으로 밝혀졌습니다. 여러분은 외계인을 어떻게 바라보시겠습니까? 일부 외계인의 소행이니까...라고 태평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남성 동지 여러분, 왕따 문제가 심각했을 때 다들 방관자들이 더 나쁘다고 손가락질 한 번씩 하셨지요? 반에서 한 친구가 왕따를 당하다가 살해당했습니다. 내가 살해한 게 아니니까 라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꿈꾸었던 21세기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는 세월호 침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참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일함이, 부정직함이, 불의함이, 욕망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낸 시대의 참극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기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 각자의 양심에 대고 한 맹세가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무수한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사건, 성폭력 사건들은 우리 남성들이 연대책임을 져야 할 문제입니다. 정작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을 향해 손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그 손가락을 우리 자신에게로 향해 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그 사건들은 '남성들'이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이 저지른 범죄는 먼저 우리 남성들이 생각하고 반성해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남성 동지 여러분, 저 추악한 남성 범죄자들을 더 이상 좌시하지 맙시다. 우리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들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안의 '남성성'을 돌이켜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죽이고 성적으로 유린하는 수준의 폭력성을 낳게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21세기 선진문명국에서 살아가는 당당한 어른입니다. 이제, 우리 몫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매거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냥 대한민국의 생물학적 남성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만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지성'이 있으니까요. 앞으로 이 매거진을 통해 함께 반성하고 21세기에 걸맞은 남성의 모습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5. 18. 멀고느린구름.


다시 한 번, 무고하게 희생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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