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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Oct 04. 2016

성폭력 예방 교육은 여자아이에게만? 2

페미니즘 교육 3

천진한 남자아이들을 우리 사회는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남자아이들에 대한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성폭력'이란 무엇인지부터 합의를 하고 시작해야겠다. 


성폭력 : 성적인 행위로 남에게 육체적 손상 및 정신적ㆍ심리적 압박을 주는 물리적 강제력.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그대로 따온 것인데... 대한민국 대표 사전이라고 하기에 풀어놓은 말의 수준이 참 조악하다. 성'적',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물리'적'... 무슨 설명에 이렇게 모호한 '적(的)'이 많은 걸까. 정신과 심리는 어떻게 다른 것이며 정신과 심리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물리력'이라는 것은 또 뭔가. 이 정도면 그냥 설명하기 싫은 게 아닐까 싶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리해보자. 


성폭력이란, 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을 이용하여 성과 관련한 상대의 몸이나 마음, 혹은 모두를 공격하는 행위다. 


위 정의에서(호언장담하듯 말했지만 이것도 최선의 설명일까 싶기는...^^;) 중요한 포인트는 '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을 이용하여'라는 부분이다. 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은 여러 가지 것들을 복합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직장 상사는 부하 직원보다 서열이나, 행사할 수 있는 권한 등에서 우위에 있다. 남자는 여자보다 (대체로) 힘에서 우위에 있다. 어른은 아이보다 힘과 통제력에서 우위에 있다. 부모는 자녀보다 경제력, 힘, 권한 등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 교사는 학생보다 학교에서의 통제력에서 우위에 있다. 고참 군인과 하급 군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학을 먼저 들어온 사람이 뒤에 들어온 사람의 신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으로 까지 추락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


이렇게 모든 관계 속에서 우위에 있는 자가 권력관계의 하위에 있는 이에게 성과 관련한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두 성폭력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외적(?)인 현상으로 남자 부하 직원이 여성 상사를 성희롱하거나, 남학생이 여교사를 성희롱하는 등등의 사회적 관계를 역행하는 현상도 왕왕 일어난다. 허나 이 역시 넓게 해석하면 사회적 관계를 뛰어넘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의 권력 구조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우위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부 남성들이 '성욕'의 문제 운운하는 것은 동물원에 가서 침팬지와 논의해야 할 수준의 이야기이고


이 포인트를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성폭력'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폭력이란 근원적으로 사회적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매우 저열하고 비겁한 폭력이다. 이 바탕에는 보다 큰 힘을 가진 이는, 보다 약한 상대의 정신과 신체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는 위험한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일부 남성들이 '성욕'의 문제 어쩌구하는 것은 동물원에 가서 침팬지와 논의해야 할 수준의 이야기이고,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이 '위험한 사고방식'에 대해 깊이 살펴보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 본격적으로 좀 생각을 해보자. 왜 대체로 남자들만이 이런 '위험한 사고방식'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 남성들이, 그리고 우리 남자아이들이 장차 성폭력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남성들의 힘을 활용한 끝없는 전쟁을 치뤄야 했던 시대의 가부장 문화. 인류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고, 기계의 힘을 통해 여성도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된 지금도 가부장 문화는 그대로다


먼저, 수천 년을 이어온 전 세계적 가부장 문화의 관성을 들 수 있겠다. 많은 고대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역사 기록 이전의 시대에는 지구에 전반적으로 모계사회(어머니의 계보를 따라 공동체가 형성되는 사회), 혹은 모권사회(어머니, 여성이 사회의 리더가 되고 권력을 쥐는 사회)가 존재했다고 한다. 대략 기원전 4.000 - 5,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계사회와 모권사회가 남성 가부장의 강력한 힘과 권력 앞에 붕괴된 이후로 약 반 만년 동안 가부장사회가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아시다시피 다시 이 지구에 '여성 권리'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최근세의 일이고, 여성이 참정권을 지니게 된 것도 아직 채 백 년이 되지 않았다. 이런 압도적 사회환경조건에서 상당한 수의 개명한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동등하게 여기는 현상은 오히려 놀라운 일인지도 모른다. 


일부 남성들은 과거 반만 년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과거로 오히려 끌려들어가고 있고, 일부 남성들은 완전히 중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수의 남성들은 그 양자의 중간 지점에서 가부장제의 중력과 싸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매거진의 작명에 영감을 준 남성 페미니스트 총리의 담화문 발표


우리 시대의 성교육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역할을 분명하게 담당해주어야 한다. 남자아이들이 저 강력한 과거의 중력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건강한 성의식을 지니도록 장려하고, 점검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이 계몽의 역할이 결코 여성들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남성들이 하나의 주체적인 생명체라고 한다면 여성들의 이해나 양보, 칭찬과 조언 등등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충분히 과거의 중력과 맞서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엄살을 피우며 아내나 엄마, 연인, 여성 동료가 살살 타일러 주었으면 하는 남자들을 꽤 봐서 하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남자아이들이 건강한 성의식을 지니도록 도울 수 있을까. 여기서 나의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각각 소개할까 싶다. 


먼저, 실패 사례의 경우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반에 똘똘한 남자아이와 말괄량이 타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5학년 정도면 사실 남자와 여자 아이의 신체적 능력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때다. 그런데 당시 나는 초보 교사여서 그런 부분을 잠깐 망각하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물리적 힘을 쓰며 다투었을 때, 여자아이의 편을 들며 남자아이의 양보를 부탁하곤 했었다. 


"네가 남자니까 좀 양보해.", "쟤는 여자애잖아."라는 식의 말을 종종 사용했던 것 같다. 나는 성인인 내가 여성들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해 하는 몇몇 신사적 행동들을 아이에게 똑같이 적용함으로써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고 말았다. 남자아이가 나에 대해서 '여자아이의 편만 드는 불공정한 교사'라는 생각을 품게 만든 것이다. 그 생각은 점점 더 자라나서 남자아이는 점점 세상을 오해하기 시작했다. 즉, 이 세상은 여자들의 편의만 신경 쓰고 돌봐주는 세상이고, 남자한테는 자꾸만 불편을 감수하라고 만드는 (역전된) 성불평등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젠틀맨 = 남성 페미니스트 라는 공식은 틀렸다. 어쩌면 과도한 젠틀함이 또 다른 여성혐오를 낳을 수도 있다.


오, 맙소사. 정말 나는 나의 판단 착오가 그런 큰 재앙을 초래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면밀하게 검토해볼 소지는 있지만 요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남자들의 '여성 상위 사회론'은 어쩌면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른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깊이 반성하고 사죄하는 바다. 


이후 나는 방침을 바꿨다. 힘의 우위가 뚜렷하게 차이가 나지 않을 나이에는 최대한 공평무사한 입장을 취하고, 활동이나 역할에서 전혀 성별을 고려하지 않는 교육을 실천했다. 성차가 나지 않는 시기에는 성차보다는 각 아이들의 개별적 특성에 훨씬 더 비중을 두었다. 


즉, 남자애지만 몸이 약하고 조용한 아이, 여자애지만 몸이 튼튼하고 활달한 아이 등등으로 개별적 특성에 주목해 관계를 살피고 분쟁 등을 조절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의 성에 대해 큰 편견 없이 자랄 수 있게 됐다.(물론, 그 속에도 내 개인의 여성 지향적 성향 탓에 기울어진 부분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할리우드 스타. 조셉 고든 레빗. 남자아이를 이렇게 키우려면 부모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다. 


성차에 주목하지 않고, 힘 그 자체의 차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의 다름 등에 집중한 교육은 자연스럽게 성장한 아이들에게 약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조금씩 양보할 수 있는 경향성을 심어주었다. 사춘기가 지나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와 함께 물리적 힘의 차이가 벌어지자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여자아이들의 약한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조금씩 배려를 해줬다.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부 남자아이에 비해 특히 지성이 뛰어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약한 지성 부분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위의 성공과 실패 사례에서 나는 한 가지 지혜를 얻었다. 성교육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이 곧 '성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이기도 한 것이다. 단, 오해하지는 말자. '폭력' 예방 교육만으로는 모두 제거할 수 없는 폭력의 요소가 '성폭력'에는 도사리고 있다. 다음 화에서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깊게 다뤄보도록 하겠다.


우리 시대의 성교육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역할을 분명하게 담당해주어야 한다.
남자아이들이 저 강력한 과거의 중력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건강한 성의식을 지니도록 장려하고,
점검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2015. 5. 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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