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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Nov 25. 2016

마지막 저녁, 라벤더 차를 마시며

읊조리다


마지막 저녁, 라벤더 차를 마시며

 

주전자 씨

왜 그리움을 끓이면 한숨만 나요?


라벤더 한 잎 열뜬 물 위에 띄우고

추억으로 휘휘 저으면 

마스카라 번지듯 못다 핀 꽃이 소르르 풀리고

수심 재러간 말없는 잎이

귀퉁이에 앉아 모락모락 연푸른 편지를 써요


기억나니 떠오르니 생각나니

너도 가끔 떠나간 열차를 기다리니

창 밖에 바람이 부니

비가 오거나 눈이 오니


오늘도 자전거로 골목 어귀를 지날 때

나는 보았어요

아닌 척 시침 떼며 이미 지나가버리는

새털구름 흔들바람 도랑물 고양이 비닐봉다리 

계절과 계절들


소풍 마친 아이들처럼 집으로

우린 함께 돌아갈 수 없어요

지구 어딘가 사랑을 파는 마트에도

반아인슈타인적 상품은 없거든요

페달을 뒤로 밟아도 잎새는 지거든요

찻잔을 저어도 우주는 흔들리지 않거든요


주전자 씨

왜 그리움은 식으면 웃음만 나요?


혹시 어쩌면 아마도

그리움은 구회말 투아웃의 타자가 아니었나요

패자부활전 달리기의 출발 신호가 아니었나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아무것이라도 괜찮아요


마지막 저녁, 라벤더 차를 마시며 

나는 가요

이제 더는 보고픈 게 없어요



2003. 11. 1.




2003년 11월의 나는 어쩌면 최후의 저녁을 맞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살았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인가 최후의 저녁을 기다리곤 했다. 


아마도 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지금 새벽에, 

숨을 죽이고 깨어 있을 사람들을 그다지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라벤더 차를 마신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기에 우리는 비슷한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의 종언도 이기적인 것이어서 단지 내 찻잔에 풀어놓는 수밖에 없다. 

다음이 있을까. 내일 저녁을 저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찻잔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또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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