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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30. 2017

신여성이 있던 자리 2

페미니즘 읽기 4-2

2. 조선의 신여성과, 일본의 신여성 그리고 영국의 신여성


조선의 신여성과 일본의 신여성, 그리고 영국의 신여성은 모두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기원을 따지자면 출발선에는 영국의 신여성들이 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양대 혁명을 통해 여유로운 경제상황과 인권의식의 고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얻은 중산층 여성계급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유주의페미니즘의 태동을 알린다. 이러한 참정권을 요구하며, 남성과 동등한 삶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던 ‘New Woman’이라는 용어가 일본에 전파되며 ‘신부인’이라는 말로 그리고 다시 ‘신여성’이라는 말로 변화하게 된다.


뉴우먼들의 투쟁의 결과로 영국은 1918년에 이르러 비로소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 ‘신부인’의 등장을 환영하다가 이내 국수주의와 군국주의, 그리고 동양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세계정복의 야욕을 품으면서부터 다시 전근대적 여성상을 일본 여성들에게 강요한다. 1911년 <세이토:청탑>의 창간을 기점으로 마지막으로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전개했던 히라스카 라이초우 등의 신여성은 1916년 <세이토>의 페간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몰락한 자리에 페미니즘 사상은 사라지고, 전통적 여성상 위에 근대의 치장만이 가미된 ‘모던 걸’이 역사의 무대를 점거하게 된다.


일본에서 1920년 한창 신여성이 실세하고 모던 걸이 득세하던 즈음, 조선에는 이제 막 신여성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1910년 일본에서 유학하며 힘을 기르던 그들이 드디어 대규모 컴백 무대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신여성 담론은 그 당시 일본에서 한창 입에 오르내리던 ‘모던 걸’ 담론과 함께 들어왔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신여성과 모던 걸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못했고, 페미니즘적 의식을 지녔던 일단의 신여성들도 그저 서구와 일본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물질적 유행을 쫓는 모던 걸로 폄하되기도 했다. 


* 2017년 뱀발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고찰해본다면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과 새로운 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던 '모던 걸' 역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신여성' 못지 않게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여성과 모던 걸을 굳이 '정신'과 '물질'로 나누어 구별하려고 하는 것 역시 여성을 기성의 도덕적 가치로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것일 수 있다. 또한 '모던 걸'이 '신여성'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으리라는 근거 또한 부재한다. 한국사에서 신여성의 의지는 모던 걸로, 그리고 해방 후의 여성운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3.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 신여성들이 꿈꾸었던 낭만적 사랑과 사회


사랑으로 인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모던 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해어화>


1) 낭만적 사랑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낭만적인 사랑.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처음 만나날 정열적인 키스를 하고 창문 아래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러한 운명적인 경험. 재미난 사실은 그러한 우리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이 처음 우리나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낭만적 사랑, 그 환상의 창을 처음 연 것이 바로 1920년대의 신여성들이었다. 1920년대의 신여성과 자유주의 성향의 남성들(이른바 모던 보이)이 소개하기 시작한 자유연애론은 수많은 사회적 담론을 양산하며 당대 최고 화제거리가 되었다. 당대에 나타났던 자유연애에 대한 담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을 띤다. 



ㄱ. 급진주의 - 연애지상주의*


* 급진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진영의 각각의 연애 담론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이해를 돕기 위해 연애지상주의, 연애도구주의, 연애무용주의 등의 용어를 붙여 보았다. 


1920년대에 등장했던 제1세대 신여성의 대부분이 자유연애를 자신의 근대적 사고의 기초로 삼았다. 김일엽의 신정조론, 나혜석의 정조 취미론, 김명순의 ‘애정 없는 부부생활은 매음’ 이라는 비판에서 당시의 급진적 자유연애론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 그는 낭만적 사랑이 곧 여성의 희망이라 여겼다.


이들은 진정한 연애를 통해서 자유를 얻고, 궁극적인 행복을 찾으려 하였으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윤심덕의 경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사회를 한탄하며 자신의 연인 김우진과 함께 동반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동반자살은 한때 낭만적 사랑의 최고선으로 추앙받고, 유행하기까지 했다.*


* 얼마나 고운 죽음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죽음의 고움. 죽음의 아름다움. 두 죽음이 있어 우리에게 아름답고 고운 인상을 줄 때 한양성의 중의, 아니 조선 천지를 헤매이는 청춘남녀는 모두 행복스럽게 뵙니다. 근심이 뭐냐. 괴롬이 뭐냐. 곱게 아름답게 언제든지 떼어버릴 수가 있지 않은가. (우상규 1933:85)

- <신여성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최혜실. 152p>


급진주의 계열의 신여성들은 자유연애를 통해 마치 '사랑의 감정'이 처음 조선에 발생한 것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마치 조선의 과거에는 아무런 남녀간의 사랑과 정이 없었던 것처럼, 억압과 계약만이 있었던 것처럼 여겼고, 그것을 성취하기만 하면 모든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것이 결국 그들의 한계로 작용했다. 사랑은 불완전했고, 개인 간의 사랑으로 뛰어넘기에는 사회의 벽은 지나치게 높고 공고했다. 게다가 남성들에게는 없고, 여성들에게만 존재하는 유리천장은 상상할 수 없이 두터웠다. 



ㄴ. 자유주의 - 연애도구주의


1930년대 주로 남성들에 의해 시작된 연애담론. 신여성들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면, 모던 보이들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영희, 박태원, 채만식 등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연애의 정신적, 생물학적, 사회적 측면 등 다양한 면을 고찰했다. 궁극적으로는 연애가 가족의 형성, 나아가 공공의 이념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연애 그 자체보다 사회 변혁의 수단으로서 자유연애를 활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카프 소속 사회주의 문학평론가였던 박영희는 '자유연애' 는 곧 봉건사회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했다
1930년대 경성의 놀라운 풍경.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자유연애가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바꾸리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언문과 행동은 달랐다. 당시 조선에서 글 깨나 쓴다는 남성들이 주장했던 '자유주의 연애론'은 좋게 말해 자유주의지, 사실상 신여성과 적당히 바람을 피며 유희를 즐기고 싶은 욕망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신여성에게 지나친 자유를 부여하면 장래에 본인에게 위협이 되기에 필요에 따라 모던 보이가 되었다가, 여차하면 가부장적 양반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모던 걸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되, 본처와 이혼은 절대 불가하고, 여성은 모두 현모양처가 되야 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남성들이 전근대에서는 탈피했을지 몰라도, 가부장제로부터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3부에 이어서)


2005. 봄. 멀고느린구름.

* 2005년 초고를 기반으로 각주 등 일부 내용을 오늘날에 알맞게 수정했습니다.





참고도서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최혜실. 생각의 나무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 이배용 외. 청년사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김경일. 푸른역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최은희. 문인재

<낭만적 사랑과 사회>재크린 살스비. 박찬길 역. 민음사

<전혜린 이야기>이덕희. 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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