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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고느린구름 Mar 26. 2018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을 추억하며

어느 하루의 이야기

어릴적부터 나는 상당히 고지식한 인간이어서 '커피'는 응당 성인이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게 커피는 술이나 담배와 같은 청소년 접근 금지 품목이었던 것이다. 그 흔한 일회용 커피믹스도 명절에나 한두 번 입에 대어 보고는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에게 커피는 대학생이 될 무렵까지 안개에 둘러싸인 신비의 식품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 먼 타지로 유학을 와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녔다. 이전에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 같은 것은 해본 경험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가게에서 일해본 적은 없었던 나였다. 몇몇 호프집과 편의점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것이 '보헤미안'이라는 이름의 낡은 지하 까페였다.

보헤미안.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이름인가. 문학소년 시절부터 나는 늘 보헤미아 지방의 드넓은 초원에 앉아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양떼구름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었다.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예술가의 삶을 사는 보헤미아의 집시들도 참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시골의 낡은 다방 간판처럼 허름했지만 '보헤미안'이라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벽면은 마치 중세 유럽의 커피하우스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보헤미안에 들어선 순간 나는 그 아름다운 공간에 완전히 홀려버린 것이다. 그곳에는 드뷔시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짙은 커피향과 함께 내가 꿈에 그리던 중세 유럽 커피하우스의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구석 어딘가에서 가난한 소설가가 필생의 역작을 쓰고 있을 것만 같은 황홀한 공간. 그것이 보헤미안의 첫인상이었다.  

기관차를 닮은 로스팅머신


중앙 테이블에는 갖가지 커피밀과 드리퍼들이 놓여 있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모습도 살짝 보인다.


남자 아르바이트생은 받지 않는다는 점장님의 방침을 간곡한 눈빛으로 무화시키고 나는 내 생애 첫 정식 아르바이트로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의 점원을 선택했다. 그후 6개월 가량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우아하게 커피를 내리는 일을 할 줄 알았더니... 커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설거지와 청소, 갖은 잔 심부름만 반복했다. 장소만 커피하우스지 하는 일은 시골학교의 소사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점차 일에 지쳐갈 무렵에야 점장님은 내게 커피를 내리는 드립 주전자를 잡아 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의 혹독한 커피 수업은 시작되었다. 90도가 넘는 주전자를 맨손으로 잡으며 오른 손바닥은 화상과 굳은 살의 정원이 되었다. 내가 내린 커피가 맛이 없으면 점장님은 손님이 아무리 독촉을 하든 말든 커피를 싱크대에 냅다 쏟아버렸다. 하루에도 내 덕분에(?) 버려진 커피가 수 십 잔은 족히 되었다. 손에 경련이 일 정도로 드립을 하다가 자칫 물을 잘못 내리면 메뉴판이 내 뒷통수를 강타했다. 그러기를 다시 수 개월 뒤. 점장님은 내게 가게 오픈과 오전 시간을 전담시켰다. 내 커피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오전 시간을 전담하게 되면서 나는 아침마다 개시 커피를 내려서 시음회를 가졌다. 원두별로 조금씩 드립을 해서 맛을 보고 내 커피의 결점들을 보완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독문과에서 교환 교수로 와 계시던 독일인 교수 한 분이 내 커피를 마시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외쳤다. 

"원더풀!"

그 순간 그간의 고생이 눈녹듯 소르르 스러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커피를 금기의 음료로만 알고 커피맛이라고는 '쓰다'라는 표현밖에 사용하지 못하던 내가 원조 유러피언에게 인정 받는 날이 올줄이야! 커피를 내릴 때마다 항상 그날의 감격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온 마음을 다해 커피를 내린다. 내 정성이 정갈한 물줄기를 타고 커피 곳곳에 스며들어 고단한 이웃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커피를 만드는 주방


이 커피 열매 그림은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헤미안의 커피향을 머금었다

   

보헤미안에서 나는 2년 남짓 근무했다. 6개월은 머슴살이였으니, 1년 6개월 정도 바리스타 흉내를 내본 것이다. 당시에는 '바리스타'라는 직업도 사람들에게 생소하던 때였고, 전문적인 양성 기관도 없던 시절이다. 요즘에는 많이 알려졌다시피 보헤미안의 '박이추' 선생님은 커피계의 전설 중 한 분이다. 박이추 선생님은 강릉으로 거처를 옮기며 본래 본점이었던 안암동 보헤미안을 최영숙 점장님에게 인계했다. 나는 바로 그 최영숙 점장님께 커피를 배웠다.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최영숙 점장님은 내가 보헤미안을 떠나던 날 한 가지를 명심시키셨다. 커피를 안다고 잘난 체하지 말아라. 나는 늘 그 말을 경계로 삼고 있다. 


최근 안암동 보헤미안은 학교 근처에 난립하기 시작한 대형 커피 체인점 탓에 과거의 영광을 많이 잃었다. 찾아오는 이들이 적은 탓에 운영시간도 줄어들었고, 커피 한 잔의 가격은 6000원 이상의 고가가 되어버렸다. 내가 일하던 시절에는 브랜드인 보헤미안 믹스더블 커피가 2500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가격은 변했어도 커피의 맛은 변하지 않았다. 커피를 사랑하게 된 나는 전국 곳곳의 커피점을 찾아다녀보았지만 아직 안암동 보헤미안 이상의 커피는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보헤미안의 커피가 나의 '첫 커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일 새벽 일어나면 주방으로 가서 물을 올리고, 핸드밀에 콩을 넣고 간 다음, 가만히 커피를 내린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면 늘 곁에 커피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떠올린다. 20대 초반, 그 푸르던 시절에 보헤미안의 카운터에 서서 노학자가 시킨 보헤미안 믹스 더블을 정성껏 내리던 나를. 그러면 지금이라도 다시 안암동 보헤미안으로 달려가 드뷔시의 음악을 틀어놓고는, 맑은 물에다 내가 좋아하던 해바라기가 수놓인 커피잔을 씻고 싶어진다. 다시 한번 독일인 교수의 '원더풀' 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커피를 내리는 일은 기술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정신으로 하는 겁니다."


박이추 선생님의 말씀이 내 커피 속에 온전히 담기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2011. 7. 2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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