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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pr 02. 2018

조용한 열정 / 당신이 봄에 온다면 겨울따위는

테렌스 데이비스 <조용한 열정>



당신이 봄에 온다면 겨울따위는  


고독의 인상착의를 당장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스름빛의 먼지뭉치 같은 것을 그릴 수밖에 없다. 아마 시간을 조금 더 양보해준다면 조금 더 근사한 먼지뭉치를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새벽 호수의 물안개를 통과해온 것 같은 색깔의 그 먼지뭉치가 살고 있을 만한 집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이 먼지뭉치처럼 초라했던 어느 시절의 일이다.


먼지뭉치는 다행히도 자기만의 방을 지니고 있다.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언제든 글을 쓸 수 있는 조그만 책상과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스탠드도 다행스레 거기에 있다. 먼지뭉치는 가끔 잠을 자고, 가끔 자신이 왜 먼지뭉치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가끔 창 밖 나무의 이파리 색을 살피고,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술레잡기 소리를 듣고, 가끔 글을 쓴다. 대단한 글을 쓰지는 못하고, 단지 자기가 먼지뭉치로서 느낀 시시콜콜한 감정들을 종이 위에 옮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에밀리 디킨슨의 작은 방

 

먼지뭉치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누구를 기다린다. 누구란 바로 그리운 사람이다. 먼지뭉치는 밤마다 그리운 사람이 방문 밖에 서있는 장면을, 그리운 사람의 손이 노크를 하고, 차가운 문고리를 기꺼이 잡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가 문을 열고 나에게 다가온다면 그동안 침대 아래 모아두었던 정오의 미소를 모두 꺼내서 보여주리라. 하지만 아무도 아무도 먼지뭉치를 찾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상상한 고독의 인상착의와 라이프스타일이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영화 <조용한 열정>의 주인공이자 미국의 위대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아내가 있는 목사 워즈워스를 향한 마음을 담아 시를 써내려 갔다. 2층 그녀의 방에 있는 19인치 노트북 크기의 탁자에서 말이다. 미국 현대시의 조상이라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1775편 대부분은 바로 그 탁자 위에서 태어났다.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에 태어나 1886년 56세의 나이로 떠나기 전까지 언제나 방문 밖에서 시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시는 자기 자신이자, 사랑이자, 삶이었다.  


시처럼 읽혀지는 영상들


“당신이 가을에 온다면 / 여름은 쓸어버릴 거에요 / 반은 웃으며, 반은 뻥 차버리며,”

- 에밀리 디킨슨 ‘당신이 가을에 온다면(If you were comming in the fall)’ 중
 

유년 시절에 소망하던 삶을 어른이 되어 손에 넣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치 않았던 삶을 살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난다. 어떤 이에게는 인생이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인생이란 텅 비어 있는 고통이다. 19세기의 여성 대부분은 소망과 다른 삶을 살았다. 남성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던 기회들을 공평하게 얻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소망하는 일을 소망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생이 끝나고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이 생은 벗어버리고 영원을 맛보겠어요.


에밀리 디킨슨의 어머니는 열아홉살에 죽은 아름다운 소년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간직했다. 조용히 소년을 그리워했다. 소년의 죽음과 더불어 어머니 에밀리 노크로스의 삶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많은 죽음들을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 우정과 사랑, 신뢰와 가치, 시와 삶의 죽음들을. 그 모든 것을 떠나보내며 에밀리 디킨슨은 매일 밤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스름빛의 먼지뭉치처럼 침대 아래에 정오의 햇살들을 뜨겁게 모아두며.  


어머니 에밀리와 딸 에밀리 두 사람은 찾아왔다가 사라져버린, 찾아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조용한 열정>의 스탭롤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이 봄에 온다면 겨울따위는 쓸어버릴 거라고. 반은 웃으며. 반은 뻥 차버리며. 어느덧 3월의 중심에 다가가고 있다. 혹독한 겨울은 서서히 스러진다. 자연에도 세상에도 봄이 기웃거린다. 부디 기웃거리지 말고 어서, 서둘러 와주길 바란다. 이 세상의 모든 먼지뭉치가 기다림에 지쳐 사라지기 전에 부디.  


2018. 3.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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