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은 무의미함
얼마가 지난 걸까. 1인승의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달빛이 고인 강물의 한 가운데까지 나아갔다. 어디서 났는지 백자로 된 술잔을 물결 속에 담궜다. 달빛을 길어올리려고 했으나, 그만 강물 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몸은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빛이 점점 사라졌다.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새까만 어둠이 사방을 휘감았다. 물은 얼어붙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만큼 점점 차가워졌다.
오늘이 내 마지막 밤이구나 싶었더니... 곧 체온이 돌며 스르르 눈이 떠졌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이다. 몸 어디에도 젖은 곳은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정도의 짧은 꿈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전혀 다른 시간 속을 살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 일어 한 번 주저앉고 말았다. 두 번째 일어날 때는 이상이 없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인근에는 자판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과 10분 차이에 지나지 않는데도 강변의 인적은 눈에 뜨이게 줄어 있었다. 사이렌차가 출동했던 소동도 끝난 듯 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점은 둑 아래였다. 아마도 출동한 경찰이 현장 감식을 위해 그려놓았을 선명한 흰 분필의 동그라미로 알 수 있었다. 접근 금지 띠도 둘러져 있었다. 누군가가 강물로 뛰어든 것일까.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한 동안 머물렀다. 누군가의 생이 끝난 지점을 보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종착지는 어디일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죽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이고, 단지 그 끝을 마주하는 장소가 우연히 종착지가 될 뿐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누군가에게도 저 종착지는 스스로의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는 선택했다고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여기에 이르리라고 얼마전의 그는 혹 몇 년 전의 그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우리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둑을 내려가 접근금지 띠 안 속에서 보호되고 있는 동그라미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강으로부터 찬 바람이 훅 끼쳐들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몸 속으로 빙의되는 것 같았다. 멀리 가양대교의 붉은 야간 조명이 마치 요단강 저편을 알리는 신호등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혼들이 이 강물 속을 헤엄쳐 저승으로 갔을까. 얼마나 많은 백들이 이 강에서 건져져 땅에 묻혔을까. 웅크렸던 몸을 간신히 일으켜 내려온 둑을 다시 올랐다. 터벅터벅 왔던 길을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말을 걸어오는 도인들은 없었다. 음악은 듣지 않았다. 풀벌레의 울음 소리도, 우주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한 번에 걸리지 않았다. 가스차는 이래서 안 돼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걸었지만 역시 걸리지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시도에서야 차는 가까스로 운행을 허락해주었다. 한숨을 몰아쉬며 라디오를 켰다. 전형적인 여성 심야 디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렇군요. 저도 참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어요. 누구나 그런 생각 한 번쯤 하지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말이에요. 목숨을 다 바쳐 하는 사랑. 세기의 사랑. 그런 것을 다들 꿈꾸잖아요. 저도 그런 사랑 참 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막상, 그런 사랑을 하게 된다면 잘 할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은 듭니다. 신청해주신 노래 듣죠. 영화 <봄날은 간다> OST에 삽입되었던 곡이죠. 김윤아 씨가 부른 주제곡은 다들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 노래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참 좋아했던 곡입니다. 배우 유지태 씨가 직접 부릅니다. ‘그해 봄에’.
가만히 가슴을 다독이는 듯한 피아노 선율.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고 말하던 상우의 목소리. 차 안은 연인과 함께 갔던 오래전의 영화관이 되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는 차를 출발시킬 수 없었다.
2013. 2. 28.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