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유나 <말모이>
대학교 국문학과 수업시간에 사전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합의된 방식으로 교수가 강의를 조기에 마감하면, 사전 세일즈맨들이 교실로 들어와 20대 초반의 어린 국문과생들에게 1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중대형 사전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어떤 해에는 시판된 국어사전의 원조인 <민중서림 국어대사전> 증보판을 팔고, 어떤 해에는 북한의 어휘를 아울렀다는 <우리말사전>을 팔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국어사전을 대하소설 읽듯이 한 장 한 장 읽는 변태적인 취미를 지니고 있던 나는 알바비를 탕진해가며 <국어대사전>과 <우리말사전>을 구입해놓고, 10여 년 동안 3페이지 정도를 읽었다. 어떤 취미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국어사전 만드는 이야기따위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 같으니 내가 의리로 봐줘야겠어! 라는 숭고한 마음으로 <말모이> 개봉 직후 영화관을 찾았다. 조선어학회의 영화 속 가상 대표로 설정된 류정환(윤계상 분) 속에는 실제 역사의 많은 인물이 담겨 있다.
꼬장꼬장한 신념으로 해방이후 조선어학회의 정신을 한글학회로 이어간 최현배 선생,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는 영화 속 대사를 실제 역사에 남겼던 이극로 선생,
주시경 선생의 또 다른 제자이자 조선어학회 핵심 멤버로서 해방이후
최초의 상업 사전인 국어대사전(1961)을 편찬한 이희승 선생,
주시경 선생의 후계자로 스승의 말모이를 계승해 북한에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한 김두봉 선생
등이 바로 주인공 류정환 속에 깃든 선현들이다.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께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지가 너무 오래되어 이제 앞으로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될 거라는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바로 한 해 전에 남과 북의 대표자가 한 자리에 앉아 통역 없이 편안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남과 북 사이 말의 차이라는 것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10대의 신조어를 잘 모르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는 남과 북의 공식 국어사전이 일찍이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를 만들고자 했던 주시경 선생의 두 제자 최현배 선생과 김두봉 선생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두 제자가 한 스승의 연구 성과와 정신을 각자의 자리에서 오롯이 계승한 덕분이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의 열사들과 김판수(유해진 분)로 상징되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우리 민중들, 또 자긍심을 잃지 않았던 교사들이 우리의 말을 지켜냈다. 그렇게 지켜진 우리말은 음악 한류와 문학으로 세계의 자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한반도에 살아가는 겨레를 잇는 가장 강력한 끈이 되었고, 가장 명징한 평화의 도구가 되었다.
1940년대는 1945년 광복의 역사를 알고 있는 미래의 우리에게는 희망의 시대처럼 여겨지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절망의 시대였다. 영원히 일제의 식민국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여기던 시대에, 우리의 말과 글이 노아의 방주처럼 모아졌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은 우리말로 쓸 수 없다면 사는 동안 영원히 작품을 발표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낙향하여 어쩌면 누구에게도 영영 읽히지 못할 소설들을 한글로 꼿꼿하게 써나갔다. 이광수와 서정주가 친일의 선봉에 있을 때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이극로 선생의 이 외침은 3. 1 독립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더욱 우리들 가슴에 뜨거운 불을 댕긴다.
배우들의 아름다운 연기가 일품이었던 영화 <말모이>를 보고 가슴이 뜨거워진 밤, 묵혀두었던 이희승 선생의 <우리말대사전>과 조선어학회를 이은 한글학회의 <우리말사전>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4페이지 째를 펼쳐 한 단어 한 단어를 조용히 읽어보았다. 오래전 어느 봄 교실에서 내게 국어사전을 건네던 세일즈맨들의 얼굴이 문득 해사한 미소로 떠올라 올 것만 같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였다. 말과 글을 잊은 민족은 민족 그 자체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말모이>를 찾는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에게는 민족도 있고, 미래도 있다.
2019. 1. 16. 멀고느린구름.
* 본 리뷰는 인천 미추홀구에 위치한 테마도서관 '여행인문학도서관 길 위의 꿈' 웹진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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