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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Oct 22. 2019

한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낡음 / 한국, 남자

최태섭 <한국, 남자> / 페미니즘 읽기 5



여성 멸시와 젊은 예인의 죽음


무거운 한 주를 보냈다. 마음 끝에 냉장고 크기의 추가 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젊은 예인, 설리 씨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이 이별에 많은 책임이 있는 보도매체들은 '극단적 선택' 운운하며 다시 설리 씨의 비보를 활용해 조회수를 올리고, 자신을 광고하기 바쁘다.


'극단적 선택'


이라는 표현은 옳은가. 옳지 않다. 설리 씨의 떠남은 '선택'이 아니었다. 한 생명에게 폭격처럼 쏟아진 수년 간의 추잡하고 저열한 댓글과 돈의 노예가 된 보도매체들의 쓰레기 기사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떠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다. 사과하지 않는다. 그저, 재빠르게 다른 대상을 찾아나설 뿐이다.


스물다섯의 설리 씨는 누구를 폭행한 적도 없고, 음주운전을 하거나, 마약에 손을 댄 일도 없다. 흔한 남성 연예인들처럼 성폭력을 저지른 적도 없다. 타인을 함부러 모함한 일도, 조롱한 일도 없다. 단지, 자신의 청춘을 열심히 살아보고자 애썼던,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고자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그녀를 늘 마음으로 응원해왔다. 그것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설리 씨가 쏟아지는 혐오와 혼자 맞서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아닌 행동으로 도왔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세상에 없다.


설리 씨에게 쏟아진 온갖 욕설과 중상모략은 오직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여성 멸시(= 미소지니 / 여성혐오)' 하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신체에 대하여, 행동에 대하여 자유와 권리를 지닌다는 명백한 문명인의 합의는 '여성멸시' 앞에 무력했다. 여성에게는 스스로에게 편한, 자연스러운 옷을 선택해 입을 권리조차 없다는 것이 설리 씨를 비난한 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나아가 성인인 그녀의 성적 자유를 자기들 멋대로 판정하고 부풀리고, 금지했다.


"여성은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자유와 권리가 없다."


여성을 2등 인간 취급하는 여성 멸시에 기반을 둔, 도태되었어야 할 낡은 망념에 사로잡힌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똑똑히 보라. 제발 도망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당신네들의 피묻은 손을 보라. 더러운 손을 목격하라.


방금, 호명한 '당신들' 속에는 분명 생물학적 여성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성들의 문제는 나보다 훨씬 현명한 여성들이 스스로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나는 오직, 당신들! 남성들, 이 사회의 온갖 성폭력의 98%, 여성멸시의 80% 이상을 저지르고 있을 당신들에게 말한다.








<한국, 남자>와 사이버테러


최태섭의 <한국, 남자>는 근대 이후, 한국 남성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낸 역사서이자, '한남'이라는 사회문제를 심도 깊게 탐구한 사회학서이다. 남성들에게 읽혀지길 바라며 지난한 집필의 작업을 견뎠을 테지만, 아마도 대다수 남성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 이론을 다루고 있지 않다. 저자 스스로 불편해할 이들을 위해 페미니즘을 최대한 배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호명한 한남들은 책을 읽지도 않고 별점 테러를 가했다.


* 같은 방식의 별점 테러를 영화 <캡틴 마블>을 거쳐  <82년생 김지영>에도 지속하고 있다.


메갈리아와 워마드, 여성가족부, 여성학, 20세기 페미니즘 간의 차이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이들이 반페미니즘에 선봉에 서서 '페미나치'를 들먹이며, 기부니를 나쁘게 한 여성들에게 악플테러를 가한다. 온갖 성희롱, 성적 모함, 인권 유린 등을 자행하면서 '이퀄리즘' 같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페미니즘이 왜 생겨났는지, 무엇을 하려는 사상인지,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데, 그건 또 왜 그런 것인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 떠올려보고, 책을 통해서, 영상물을 통해서, 웹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음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체적인 여성들에게 사이버테러를 가하는 게 무슨 대단한 저항 운동이라도 하는 듯한 망상에 빠져 있는 남성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어리석고 비겁했던 나 자신과 당신들이, 우리가 함께 수 많은 한국 여성들을 타살했다고 확신한다.


알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이 밑에 달릴 댓글들의 내용 말이다. 보빨러, 버팔로, 김장남, 정섬돼, 페미코인 같은 표현은 귀여운 축에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악플이 달리더라도 설리 씨가 수 년간 감당했어야 할 악플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악플의 수준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현격한 차별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가부장(남성성)에 집착하는 한남들


<한국, 남자>에 의하면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일반 남성이 진정한 의미의 '가부장'을 제대로 수행했던 적은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남성은 일본 남성과 일본 여성 아래의 3등 인간이었고, 6.25 전쟁을 거친 후에는 다수 여성이 일으킨 경제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이군인이었다. 남성들의 역사로 알려져 온 산업화의 시대는 사실, 여성노동자의 수공업을 기초로 탄생한 시대였으며, 많은 여성들은 기록되지 않은 맞벌이와 가사노동, 육아를 동시에 수행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훨씬 많은 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강제해고를 당했지만, 사회는 오직 남성과 아버지들만을 위로했다. 위로에 취한 남자들은 룸살롱을 떠돌았다. 여성들이 아이들의 상처를 돌보는 동안.  


이처럼 한국 남자들은 가정의 경제와 안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엄밀하게 수행한 적도 없으면서, 가장의 권위가 실추되었다며 울고, 여성상위의 역차별 세상이 되고 말았다며 한탄하고, 남자들의 고뇌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아주 소수의 특별한 남성들을 제외하고, 보통의 남성들이 지난 100년 간 종종 해왔던 일은 밥상 뒤엎기, 호통 치기, 술주정하며 행패부리기, 버릇없다며 자녀들 폭행, 꼰대질, 완장질, 성차별, 성희롱, 성폭행, 성매매, 절도, 협박, 유괴, 살인 등등이다. (강력 범죄의 약 80% 이상이 남성 소행)



치안의 우수성을 자찬하는 한국 사회는 여성에게'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남성이라는 성별에 애초에 실추될 권위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이 실추되었다는 말인가? 반페미니즘 기조를 이끌고 있다는 10대, 20대 남성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대체 뭘 잃었다는 말인가? 성희롱을 자유롭게 할 권리, 꼰대질을 자유롭게 할 권리, 설거지를 하지 않을 권리, 밥상을 뒤엎을 권리를 다시 달라는 말인가? 우리에게도 마음껏 여성을 차별할 기회를 달라는 말인가? 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반대하고 있는 건가?


2015년 잠시 생겨났다가 1년도 유지를 못하고 사라져버린 '메갈리아'는 웹상에서 십여년 간 성희롱과 여성멸시를 당해오던 젊은 여성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그동안 당해온 모든 것을 그대로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준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한남들은 아주 짧은 순간의 성희롱과 혐오도 견뎌내질 못했다. 한국 인터넷 공간의 70-80%를 점유하고 있다는 남성들은 집단 공격을 가해 메갈리아를 금세 소멸시켜버렸다.


그러나 한남들은 여전히 여기저기서 메갈리아를 호명하며 소환하고 있다. 마치 아직, 메갈리아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남들은 사라진 지 오래인 유령들과 싸운다. 애초에 그남들이 떠올린 역차별, 여성상위시대, 여성우월주의 라는 것이 공상에 불과하기에 공상의 적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니지만.






미러링 페미니즘, 우리 모두 '한국남자'이길 포기하자


그동안 웹 공간에서 여성들을 된장녀, 김치녀, 꽃뱀, 창년, 걸레, 갈보, 맘충 따위로 호칭하던 남성들이 '한남'이라는 예절바른 호칭에 눈이 뒤집어지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똑같이 여성들을 더 이상 위에 나열한 더러운 말들로 부르지 않고 '한녀'로 부른다면 어떨까. 오히려 그녀들은 크게 환영하며, 한녀라는 호칭에 자긍심을 느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현주소가 있다. 한국 남성들은 '한국 남자'라는 호칭에 모멸감을, 한국 여성들은 '한국 여자'라는 호칭에 자긍심을 느낀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대체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오고 있었던 것인가?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구심점을 통해, 정체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연대의 의지를 다지는 동안 한국 남성들이 스스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남성이라는 우리의 젠더 정체성에 대해 자문해본 적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느낀 적도, 가치 있는 연대의 의지를 내어본 적 조차 없다. 존재한 적도 없는 '한국 남자의 권위와 권리'라는 허상에 매달려 분풀이 대상을 찾고, 응석이나 부리고 있었을 뿐이다.


애초에 페미니즘은 성별에 기반한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이자 사상


보도매체들은 여혐, 남혐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통틀어 일컫으며 우리 시대를 '혐오의 시대'로 프레이밍한다. 옳지 않다.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갖는 것은 혐오가 아닌, '멸시'다. 2등 인간으로 대하고, 성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애정하고, 상징적 구원의 도구로서만 신성화한다. 뭇 남성에게 여성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존재하면 그만인 멸시의 대상이기에, 그녀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설칠 수 있는 동등한 생명체라는 자각이 부족하다.


반면, 많은 여성들은 진정으로 남성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진짜다. 물론, 남성을 혐오스러운 종으로 만든 것은 남성들 자신이다. 최근 보도된 23세의 한국 남성 손정우는 2~4세 여아들이 성적으로 학대 당하는 범죄촬영물 22만여 건을 웹사이트에 올려놓고 국제적으로 유통했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부는 이 자에게 1심 집행유예, 2심 1년 6개월의 형벌을 내렸다. 지성과 양심을 가진 인류가 어떻게 남성이란 성별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의에 대한 온당한 항거와 이의제기를 '혐오의 시대'라는 불철저한 프레임 속에 가두는 것은 또 하나의 억압이다. 남성이 여성을 멸시해온 역사는 수천 년에 달하고, 여성이 남성을 정말 혐오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5년 남짓이다. '혐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여성멸시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가부장제에 의해 박제되어온 여성성을 깨부수고(탈코르셋 운동 등), 오직 자기자신이 되는 삶의 혁명을 이루어가고 있다. 애초에 페미니즘은 성별에 기반한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이자 사상이었다.


우리 남성들이 진정 설리 씨를, 그동안 멸시와 성폭력에 희생되었던 숱한 여성들을 애도하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페미니즘을 미러링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하는 그대로를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바로 오늘부터 한국 남자이기를 포기하자. 낡아빠진 남성성으로부터, '진짜 남자'가 되라는 모든 가부장제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자. 우리는 우리 전 세대의 실패한 가부장들처럼 꼰대일 필요도, 반인권적 독재자일 필요도, 자기연민에 빠져 성매매를 일삼는 루저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더 이상 (기존의) 한국 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낡은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남성도 진정한 여성도 아니다. 오직, 우리 자신일 뿐이다.


그림 출처 = https://blog.ahnsanghee.com/631



2019. 10. 22. 멀고느린구름.





P.S


이 글을 쓴 나 또한 20대 시절 내내, '남자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혹은 해도 된다)'는 망상에 빠져, 폭언과 가스라이팅에 의한 데이트 폭력을 저지른 일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자들은 다 그러니까 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며 포르노 영상물에 빠져든 때도 있었다. 겉으로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에 비해, 이성애자 연인으로서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제멋대로인 성격 탓에 결과적으로 인연을 맺은 여성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히며 살아왔다. 어머니를 학대했던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했다. 오랜 세월 어린 시절의 상처를 빌미로 응석을 부렸다. 상대에게 구원을 갈망했던 만큼 상대도 나에게 같은 것을 기대했으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깨뜨리며 찾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가급적 주제 넘은 얘기를 글로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설리 씨의 죽음을 대하며 그것 또한 하나의 비겁함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고, 페미니스트의 자격도 없지만, 스물다섯 청춘의 죽음을 대하며 홀로 많이 울었다. 나 자신을 벌하고 싶은 충동을 견디며 힘겨운 밤들을 보냈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여겼다.


머리로나마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남성들마저 주춤거리며 낡은 한남들과의 개싸움을 회피해 왔기에 이런 세상이  것은 아닐까. 얄팍한 용서를 구하고자 서평의 형식을 빌려 부끄러움을 릅쓰고  글을 쓴다. 10, 20 남성들이 모쪼록 나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물론, 나보다 훨씬 올곧은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남성들 또한 많을 것이다. 그분들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앞으로도 부단히 노력하겠다.  글은  땅에 함께 살아가는 그남들을 향한 호소문이자,  자신을 향한 반성문이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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