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시콜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진 Mar 16. 2020

지니어스 로사이에 가고 싶다

어느 하루의 이야기


문득 지니어스 로사이에 가고 싶다. 10대 시절에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제하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했었다. 채널을 돌리다보면 EBS 자리에서 어느날 어느 순간 즈음에는 청량한 파도소리와 함께 고즈넉한 섬마을의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내 청소년 시절은 어쩐지 지금보다 훨씬 더 노인의 마음으로 가득했었기에 조그만 브라운관 티비에서 밀려나오는 파도와 저물녘의 다홍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큰 위로를 얻었다.


유년에 새겨진 기억은 대체로 청춘의 기억보다 선명하다. 시간이라는 것은 기억의 편집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 해상도로만 보면 내게 시간은 10대, 20대, 30대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음이 불안정한 지금이 오히려 항상 가장 흐릿하다. 30대 초반이라고 아직 말할 수 있었던 시절에 지니어스 로사이를 처음 방문했으나, 어쩐지 그 기억은 10대 시절의 것처럼 선명하다. 마치 어느 봄 주말에 '그 섬에 가고 싶다'를 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주행 배를 타고, 섭지코지의 지니어스 로사이에 도착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곳에는 당신이 있었다. 당신 또한 10대의 어느 봄에 갑자기 집을 나선 것으로 해두자. 우리는 큰 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만나 함께 지니어스 로사이를 찾았다. 내가 당신을 만나기 이전부터 안도 다다오를 알고 있었는지, 당신을 통해 안도 다다오를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안도 다다오를 떠올리면 당신이 따라 오고, 당신을 생각하면 안도 다다오의 담담한 고요를 떠올리게 되니, 당신이 있어 내 마음에 안도 다다오가 자리한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문득 살아오던 그간의 삶을 떠나 지니어스 로사이에 손을 맞잡고 발을 들였던 우리는 마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주하거나 상상해본 적 없었던 세상의 끝, 혹은 세상의 처음에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그곳은 나선형 은하의 어느 한 지점이면서, 달의 대지 어딘가이고, 아직 펼쳐지기 이전인 인생의 한 부분이기도 했으며, 영원하지 않거나 영원할 사랑의 가장 깊은 곳이기도 했다. 먼 파도 소리가 들렸고, 우리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지만 깨끗했다. 적막한 콘크리트 벽을 마주하며 침묵으로 함께 서 있을 땐, 별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당신과 나는 단지 거기 머무는 곳을 통해 지나간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날들 속 서로의 눈물들을 닦아주었다. 지니어스 로사이를 나왔을 때 우리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미처 감각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청춘의 시간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여서 좋았다고 생각했다.


문득 지니어스 로사이에 다시 가고 싶다. 반 십 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했던 우리는 아직 그 안도 다다오의 성 안에 남아 영겁의 시간을 기뻐하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늘 그곳에 가면 그때의 우리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러니 긴 숨을 내쉬고,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다만 그리워 할 뿐.


2020. 3. 16. 멀고느린구름.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에게 날아드는 무례한 제안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