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드의 계절 / 모드 루이스와 사랑의 조건

랜스 울러버 <모드의 계절>

by 장명진



인천의 서쪽 끝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 자리한 책방 '나비날다'에서 <모드의 계절>을 발견한 것은 두 해 전이었다.


"<오리의 여행>이랑 표지 디자인이 비슷하네."


책의 규격과 표지 속 글의 배치,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부터 책등까지 일란성 쌍둥이처럼 내가 만든 사진동화책 <오리의 여행>과 닮아 있었다. 표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도 예로부터 흔히 쓰이던 바이닐 표지 형식을 참고해 디자인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페이지를 넘기자 몹시도 내 취향의 그림들이 연거푸 펼쳐졌다. 책방 밖에서는 겨울바람이 '휘오옹'하는 소리를 내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캐나다의 동쪽 끝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항구도시 딕비의 사계절을 대한민국의 서쪽 끝 항구도시에서 들여다보려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내 오리 책의 배다른 자매처럼 여기며 <모드의 계절>을 그날로 구입했다. 집 서가에 표지가 잘 보이도록 진열해놓고 겨울을 보냈다.





오고가는 계절 속에서 <모드의 계절>을 펼쳐, 모드 루이스의 그림을 바라보면서도 책에 쓰인 글은 읽지 않았다.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긴 독생을 살다보니 글을 읽는 것에도 다 시절인연이 있었다. 나는 <모드의 계절>을 마주할 때가 언젠가 오리라고 여겼다.


그 때는 아픈 이별을 경험한 후에 왔다. 마음의 문을 걸어잠그고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코로나가 오기 전에 이미 방역 3단계를 이행하던 시절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공연히 떠올리고, 무능한 내 능력과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삶의 조건들을 한탄하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머릿 속에 잿빛 눈덩이처럼 자주 굴려보던 겨울이었다.




모드 루이스는 단지 누구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 떠났다.


커피를 내리고 무기력하게 책 속의 글자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모드 루이스는 캐나다의 무명화가로, 사후 30년이 지난 뒤에야 캐나다를 대표하는 민속화가로 유명해졌다. 먼저 소개했던 대로 캐나다의 동쪽 끝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항구도시 딕비에서 그림을 그리다 고요히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집은 9 제곱미터 크기의 단칸방으로 부엌과 거실이 그 작은 공간에 다 모여 있었다. 허름한 오두막이었고, 거실의 창문을 통해 빛은 간신히 들어왔다. 모드 루이스는 대부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에는 불행과 어둠의 기색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그림을 사랑했고, 그림을 그리는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며 행복해했다고 한다. 모드 루이스에게는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한 톨도 없었고,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그저 몇 푼을 받고 팔았다. 모드 루이스는 단지 누구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 떠났다.



모드 루이스와 그녀의 오두막집



<모드의 계절>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꾹꾹 참았던 눈물을 한참 동안 쏟아냈다. 유명해지고 싶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면 사랑하는 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여러 책을 통해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바보처럼 살았다. 모드 루이스의 삶은 아무런 꾸짖음 없이 나를 꾸짖어주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좁은 다락방의 어둠 속에서 나는 왜 글을 쓰기 시작했던가.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글을 쓰고 있으면 행복했기 때문이다.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궁지에 몰리다보니 그 유년의 감각을 자꾸 잃어버리게 되었다. 평생 그 유년의 감각을 지켜낸 모드 루이스의 삶은 소박하고 위대하다.


욕망을 비우는 수준이 그녀에 이르지 못한 나는 모드의 그림 한 점을 사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다락방에 걸어두었다. 주생활 공간이 다락방이어서 매일 그녀의 그림을 바라본다. 그리고 삐죽 솟아나오려는 세속의 욕망을 누르며 나에게 묻는다. 다만 지금 너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2020. 9. 19. 멀고느린구름.




다락방에 걸어둔 모드 루이스의 그림. 판화(실크스크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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