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몇 달 동안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을 사랑하지 않았다. 불 꺼진 거실을 방치하고, 집필실 문을 열지 않았고, 정원에 나가 별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침실은 옷장에서 옷을 꺼내기 위해 잠시 들를 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구름정원’이라고 이름 붙이고 오래 사랑했던 이곳을 내가 싫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명백히 이 집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구름정원은 말하자면 내가 오래 꿈꿔오던 신혼집이었다. 멀리 산 봉우리가 있어 계절의 흐름을 느낄 수 있고, 작은 정원이 있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나가 바람을 쏘이고, 햇살을 받을 수 있는 집. 비가 오면 빗소리가 눈에 보이는 음악이 되고, 책으로 가득한 거실에 앉아 고단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장소. 구름정원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건물의 옥상과 면해 있는 보통의 가정집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그곳임을.
사업의 실패로 빚더미에 앉아, 잔뜩 움츠러 들어있던 나는 구름정원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혔었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 이사를 감행했다. 그리고 이사를 마치고 한 달 남짓이 지났을 무렵, 영원을 꿈꾸었던 연인과 이별했다. 구름정원은 그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별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고자 나는 두문불출하며 구름정원에 잃어버린 삶의 의미, 사랑의 의미들을 새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이런 자리가 있다면 좋겠지. 이걸 보면 놀라겠지. 이런 것도 있다고 자랑해야지. 당신은 이곳에 앉아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나는 이쯤에 앉아 그런 당신을 몰래 훔쳐봐야지. 어쩌면 구름정원은 나만의 평행세계와도 같았다.
몇 해가 지났고 꿈은 꿈이었을 뿐임이 명백해졌다. 내가 스스로 쌓아올린 그 모든 의미의 공기들은 이제 구름정원 곳곳에 스며들어 나를 엄습한다. 그러므로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나는 이 집의 가장 작은 점으로 움츠러 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 4월 초, 집필실로 향하는 나무계단이 썩어서 뜯어낼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고쳐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모처럼 한가하고, 화창한 휴일이었다. 커피를 내려 거실에 앉아, 김동률의 앨범을 들으며 구름 한 점 없는 쨍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길었던 인연의 한 장이 모두 끝났음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창을 열고, 바람을 통하게 한다. 하얀 커튼이 하느작거리며, 정원의 풍경 소리가 작게 울리고,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소리, 도로변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 어린 새들의 울음 소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깨닫는다. 여기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세계구나. 그것이 허망한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도 바로 내가 사랑했던 것들, 꿈꾸던 것들이 모두 여기에 남아 있다. 이것은 내 사랑의 과거인 동시에 내 사랑의 미래다.
이제 진심을 다할 수 있을까? 다시 이곳을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우선, 집필실로 향하는 나무계단을 고친 다음 천천히 이 물음에 답을 시작해야겠다.
2021. 5. 1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