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긴 겨울이 지나고 영화 <봄날은 간다>가 개봉하던 즈음 나는 그녀와 다시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스물한 살의 우리 둘은 조심스레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노라고 전했고,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흐의 피아노 소곡이 먼 빗방울처럼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창이 하나도 없어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지하의 커피하우스, 입구쪽 좌석에 앉은 우리는, 아니 그녀와 나는 까만 밤을 닮은 커피를 조금씩 입에 머금었다. 사람들이 아직 원두커피를 ‘블랙커피’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자.”
내 인사를 끝으로 그녀는 풋풋한 사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커피하우스의 주방으로 향했다. 아르바이트 시작 시간은 1시간 정도 남아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봄볕이 쏟아지고 있을 지상의 거리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개수대에 그녀와 나의 커피잔을 씻고, 서빙을 시작했다. 벌써 20년 전의 봄이다.
그녀와 내가 마주 앉았던 자리는 19년 전에 이미 사라졌다. 그 자리는 커피하우스 주인의 사무공간이 되어 훨씬 더 긴 세월을 보냈다. 어쩌면 그곳에 ‘우리’의 자리가 아주 잠시 있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별에서 나 한 사람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오래 그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일했고, 사랑했던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은 올해 가을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 어제는 그 안녕을 고하는 조촐한 행사에 다녀왔다. 점장님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주로 2006년 이후의 커피하우스를 얘기했다. 나는 혼자 조용히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의 향기와 음악,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했다.
강배전된 원두를 핸드밀에 넣어 갈고, 물을 끓이고, 서버와 드리퍼를 준비하고, 뜨거워진 물을 드립용 주전자에 옮겨 붓고, 종이필터에 커피가루를 담고,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담아 한 잔의 커피를 내리는 매일매일의 그 순간에 나는 늘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의 주방에 선다. 첫 물줄기가 커피 가루에 닿고, 향이 확 끼쳐올 때면 그곳에 늘 흐르던 고전음악의 선율이 들리는 듯하고, 온통 커피색이던 목조 인테리어 공간이 떠오른다.
지도 위의 보헤미안이 사라져도, 나는 언제든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영원한 청춘의 공간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곳으로 초대할 수 없다. 내게 커피가 어떤 의미냐고 묻는 이들에게 안암동 보헤미안에 가보라고 권할 수 없게 됐다. 그것은 지독한 슬픔이자 외로움이다.
안녕, 나의 보헤미안. 또 보자.
2021. 6. 6.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