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무엇이든 써보자고 한 달만에 내 자리에 앉았다. 날은 흐리고, 습한 공기가 온 몸의 숨구멍을 막고 있는 듯한 날씨다. 해야 할 일은 많으나 하고 싶지 않아서 농땡이를 부리며,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 음반을 듣고 있다. 느린 가야금 소리가 어지러운 마음의 물결을 다스린다.
가야금의 음률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것이 매력이다. 우리네 삶과 닮았다. 곡의 어느 부분에서는 정말 곡이 끝난 것인가 싶을 정도로 긴 침묵이 있다. 어 끝났나? 하고 오디오 화면을 보면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운명의 벌판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막막한 세월은 가능성의 시공인 동시에, 두려움의 시공이기에 우리는 때로 그냥 그 벌판 위에 드러누워버린다.
나로 말하자면 그 세월의 어디 쯤에 납작 엎드려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드러눕자니 뭔가 남은 것 같고, 일어서서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자니 막막하다. 그러니 사방을 둘러싼 안개 어딘가에서 구원의 빛이 반짝 비춰질 그 순간을 기다리며, 그저 엎드려 있는 것이다. 언제라도 일어설 수 있게끔.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소리와 가야금의 음률이 서로 엉망진창으로 어긋난다. 그러나 듣기에 나쁘지 않다. 자연은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째서 아름다운가. 중구난방이었던 청춘을 돌아보며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 그 마음과 조금은 닮아 있는 듯하다. 황병기 선생께서 새로운 곡조를 뜯기 시작한다. 이번 것은 빗소리 장단과 딱이다.
2021. 8. 1.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