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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Jun 25. 2021

청춘의 빛은 어디에서 오나

어느 하루의 이야기

모두가 청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요즘이다. 푸를 청에 봄 춘. 싱그러운 것들로 가득 찬 이 단어의 실체는 언제나 먹구름과 안개가 가득한 것이었다. 서점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오른 것을 보며, 별 웃기지도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구나 싶었던 게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청춘이 힘을 가졌던 시대는 한 세기 전의 끝인 90년대까지였다. 21세기 이후 청춘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은 오직 티브이 속뿐이었고, 그마저도 과거를 회고하는 방송들이 인기를 끌고, 기존의 진행자, 기존의 배우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점차 새로움은 주목 받지 못한 채 빠르게 시들고 말았다. 자리를 선점한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온 21세기의 20년은 어땠나? 새로운 세대는 20세기의 끝과 21세기의 모두를 살아온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생물학적 나이를 두고, 청춘을 판가름한 적은 없다. 오히려 20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늙어 있었고, 삶에 지쳐 있었다. 전혀 싱그럽지 못했다. 봄이라기보다는 눈따위는 내리지 않는 삭막한 겨울과 같았다. 나는 세상을 움직일만한 중심에 서본 적도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쩌면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의 모습에 책임이 있다. 도전하고, 판을 흔들고, 새로운 가치를 심고 길러내는 그 역할을 하기보다는 늘 주눅들어 있고, 주저하고, 냉소하지 않았던가.


누구에게나 청춘은 충분하지 않다. 내전의 상처로부터 새로운 나라를 일궜어야 할 지금의 70, 80대에게 청춘은 무엇이었을까. 최근 여론조사에서 60대 이상의 정치성향과 20대의 정치성향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발견되는 것은 아마도 서로가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했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1960년의 제로베이스와 2000년의 제로베이스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늘 상대적 기준으로 자신의 지평선을 판가름하게 되어 있다. 그 지평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빠르게 꼰대가 되고 만다. 역사의 무대가 아닌, 의식의 무대를 기준으로 해야 우리는 그나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풍요로웠다고 추억하는 2000년대 초에 나는 문학상 상금 100 원과  벌의 옷을 가지고 혼자 서울역에 도착했다.  뒤로는 모두 오직  혼자 만들어 가야 하는 삶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나는 그때의 친구들보다, 지금의 청춘들에  깊은 공감을 한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도, 여기저기 흔히 보이는 또래의 삶에 접근조차   없었던  시절의 내가 요즘의 청춘과 오히려 겹쳐보이는 것이다.


청춘의 아름다움은 희극이 아닌, 비극에서 온다. 기쁨과 환희가 아닌,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온다. 청춘은 어차피 엎질러지게 되어 있는 물컵 같은 것이다. 그러니 더욱 부서지기를, 더 망가지기를, 조금 더 거침 없기를, 아주 많이 갈망하기를 조언한다. 갈 수 있다면 절망의 가장 먼 곳까지 다녀온 사람이, 끝내 회생한 사람이 삶을 더욱 풍부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사회와 제도는 모든 절망의 끝이 낭떠러지가 아니도록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청춘이 슬픔의 끝에 죽음이 아닌, 희망을 만나도록 손을 내밀 책임이 앞세대의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지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과감히 뛰쳐나가서 함께 청춘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권리일 것이다.


2021. 6. 25. 멀고느린구름.

 



sony A7 - contaxG 28mm | (c) fs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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