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고서 품은 꿈이었다. 아마 대충 에디슨처럼 신기한 것들을 발명하거나, 장차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대비해 3단 합체 변신 로봇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덕분에 초딩 시절 내 비밀노트에는 기상천외하고 그닥 쓸모없는 발명품들이 가득했고, 책상 서랍 속에는 스케치북을 오려서 만든 우주선과 로봇들이 언제나 출격 대기 중이었다.
아이큐 99로는 과학자가 되기는 무리라는 것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당시 나는 전교 꼴찌보다 1순위 앞에 있는 대단한 실력자였는데, 그럼에도 먼 훗날 언젠가 ‘우뢰매’를 직접 개발하고야 말겠다는 꿈마저 접을 수는 없었다. 그건 내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물리학과 천문학 책을 빌려다가 수도 없이 읽었다. 덕분에 수학 점수는 30점에 불과했어도 나는 중학교 2학년 봄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내 또래에 내가 이야기하는 우주를 이해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 결과 나는 더욱더 철저히 왕따가 되었다.
영혼은 이과인데, 두뇌는 문과여서 국문과에 진학했지만 과학을 향한 나의 호기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혼자 돈을 벌어서 다니느라 8년 동안 대학생으로 지내며 서울 지역의 저명한 물리학, 천문학 교수님들의 수업을 깡으로 청강했다. 내가 있던 학교에서는 철학, 종교학, 교육학 등을 복수전공으로 하며, 그즈음 생겨나기 시작한 융합전공 수업으로 ‘과학사회학’ 수업도 수료할 수 있었다.
나의 노력은 왜 헛되고, 그들의 행운은 도처에 있는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꼬마일 적부터 생명이 왜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마치 그 질문이 내 몸에 새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옛날 부모에게 나는 원치 않는 아이였고, 나를 지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나는 태어났던 것이었다. 내 속에 있는 본능적인 생의 의지가 늘 내게 물었던 것이었다. 너는 왜 태어나려 했느냐고.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가 존재하는 이 세상은 왜 태어났을까. 모든 생명은 삶과 죽음의 챗바퀴를 왜 끝없이 굴려야만 하는가. 문학에 묻고, 철학에 묻고, 종교에 묻고, 정치에 묻고, 과학에도 물었다. 수십 년의 물음 속에서야 조금씩 희미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평생토록 과학을 통해 ‘만물의 이론’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아주 단순한 물리법칙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생명을 다 설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과학은 ‘양자’라는 불확실성의 세계에 도착해 있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물질의 최소 단위인 입자도 상시적 존재가 아니다. 저자인 이탈리아 태생의 저명한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이 세계가 단 하나의 재료, ‘공변양자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의 법문처럼 세상은 ‘공(空)’이요, 존재와 현상은 양자들 간의 찰나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기(緣起)’일뿐인 것이다. 과학자의 아이디어가 돌고 돌아 다시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에 도착하듯, 철학 복수전공생의 아이디어도 돌고 돌아 부처에 이르니 재밌는 일이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는 비교적 편안한 과학 대중서다. 후반으로 갈수록 1도 이해할 수 없는 방정식들이 지면을 채우기 시작하지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생각하며 뚫고 지나가보면 그럭저럭 길이 열리는 책이다. 그러나 카를로 로벨리의 아이디어를 진정으로 상상할 수 있는 독자는 아마도 소수에 그칠 것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우주를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지난 여정을 한 번 종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초보자에게도 지식을 탐닉하는 사람에게도 괜찮은 책이다.
중2병 시절,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읽은 뒤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살아왔다. 내게 ‘시간’이란 단지 ‘변화에 대한 감각’이었다. 온 우주는 모두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생명은 입자로 환원될 수 있으며, 그 입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바닷속에 녹아 있고, 영원한 파도가 일렁일 때 서로 부딪치며 춤을 추고 빛을 발한다. 우리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까닭은 시간이 앞으로만 흐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너무 엄청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 은하를 조사하러 간 우주비행선을 (너무 멀리 갔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다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겪는 단 1초의 사건일지라도 수억의 수억의 수억의 수억 개의 입자들이 위치를 뒤바꾸는 대격변인 탓이다. 1초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 수억의 수억의 수억의 수억 개의 입자들을 1초 전의 위치로 정확히 되돌리는 일이다. 놀랍게도 단 하나의 입자조차 온 우주의 모든 입자와 관계성을 지닌다. 즉, 우주 전체가 동시에 일제히 변화해야만 우리는 ‘과거’라는 위치로 완벽히 돌아갈 수 있다.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의 꿈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입자의 움직임은 전적으로 확률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과의 비밀을 엿본다. 왜 나쁜 사람이 실패하지 않고 때로 성공하는가. 왜 좋은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가. 나의 노력은 왜 헛되고, 그들의 행운은 도처에 있는가.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자의 운동이 그 비밀을 품고 있다. 입자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경우의 경로에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입자가 어떤 경로로 이동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다만 그 가능한 모든 경로의 확률 다발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삶에 확대해본다면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적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우리의 의지로는 다만 조금 더 나은 확률의 다발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을 뿐인 듯하다. 한 마디로 최선을 다한 다음, 나머지는 신의 주사위가 잘 굴려지기를 바랄 수밖에. 반대로 거저 얻은 행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늘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고 해도, 결국 어쨌든 웃다 울고, 울다 웃는 인생이다. 우리는 모두 우주에서 왔고,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멀어진 것은 만나고, 만난 것은 멀어진다. 모인 것은 흩어지고, 흩어진 것은 모인다. 흔히 우주는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시작’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작이 없다면 끝 또한 없다. 그것이 곧 시공이 없는 ‘공변 양자장’의 세상이다. 우리가 익히 알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그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요즘 내가 하는 고민의 주제다. 물론, 결론은 신의 주사위가 내겠지만.
2023. 3. 8.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