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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y 27. 2023

플라톤의 모던경장편, 파이돈

플라톤 <파이돈>



플라톤은 실로 위대한 소설가였다. 지난 이틀 동안 <파이돈>을 읽는 내내 B.C 399년 2월 15일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장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꼈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순간 독잔을 들이켤 때, 나도 제자들의 한 사람처럼 눈물이 맺혔다. 이 정도의 작품을 이번 생에서 내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직 철학 담론만으로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과 흥미를 지켜내는 이 위대한 문학 작품은 무려 2,422년 전에 쓰인 것이다. 세상이, 아니 최소한 문학이 과연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할 수밖에 없다.


<파이돈>은 플라톤의 저작이지만 플라톤이 아닌 파이돈의 시각으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처하여 죽음으로 향하려 하는 것에 대다수 제자들은 불안과 슬픔, 의문을 품고 있다. 특히 케베스와 심미아스는 스승의 평소 지론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영혼이 이대로 소멸해버릴 것이라 여긴다. 그에 대하여 소크라테스가 의연한 태도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길고 긴 문답을 이어가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다. 스승이 죽기 직전에 내 생각은 이렇다고 하면, 제자 된 도리로 군말 없이 받아들일 법도 한데, 케베스와 심미아스는 끝까지 지지 않고 논박을 이어나간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주장을 부드럽게 수용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물러섬이 없다. 몇 시간 뒤면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임에도 제자들과의 마지막 토론 자체를 매우 쾌활하게 즐기는 모습에서 대인의 기품이 느껴진다.


수십 년간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오해한 것 같다. 도올 선생님의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나 대학 철학과의 서양철학 개론 수업 등으로 접했던 그들과 원전 속의 그들은 너무나 다른 인물인 것이다. 그동안 나는 버트란드 러셀의 소크라테스, 도올의 플라톤을 만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철학 담당 교사로서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서양철학사를 강의할 자격이 내게 과연 있었는지 뒤늦게 자문하게 된다. 내게 배운 학생들이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가능한 원전을 직접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중용’에 대해 기존에 내가 배운 바는 직선을 그은 뒤, 그 가운데 점을 취하는 행동 양식으로서 이른바 ‘균형’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그에 비해 싯다르타(부처)의 ‘중관’은 원을 그린 뒤,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전관(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한다는 것)’의 개념이었다. 공자의 ‘시중’ 역시 종합적인 성찰과 거기에 더해 ‘때(타이밍)’에 맞추어 행한다는 것이 포함된 개념으로 배웠다. 그래서 서양은 늘 시작과 끝을 전제한 제한적인 사고를 하고, 동양은 시작과 끝이 없는 통합적 사유를 한다는 것으로 논의가 확장되곤 했다.


그런데 <파이돈>에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사유는 싯다르타나 공자의 사유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영원은 정지된 영원(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원이며,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도 입자 레벨의 근원적 동일성의 지속을 말할 뿐, 나라는 고정된 정체성이 영속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생명의 윤회와 영혼의 무한한 변화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 그 윤회의 과정은 예전에 리뷰했던 <영혼들의 여행>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와 대단히 유사하여 꽤 흥미롭다)


싯다르타는 인간이 업(카르마)에 의해 윤회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된다고 보았다. 사는 동안 저지른 죄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고, 다시 살아가면서 죄와 집착을 얻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싯다르타에게는 그래서 윤회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자 고통의 본질이다. 업과 집착을 소멸시키는 수행을 통해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지향점이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욕망과 무지로부터 벗어나 철학적 사유에 집중함으로써 고매한 영혼에 이르고자 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에 의하면 철학적 사유로 단련된 고매한 영혼은 더 이상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공자는 사람이 죽으면 귀와 신으로 분리된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귀신’이라고 부르는 단어는 본래 ‘귀’와 ‘신’이었던 두 단어를 병렬해 쓴 것인데, 어느 순간 합성어로 고착된 것이다. 귀는 육체에 집착하므로, 시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상을 떠돈다. 신은 육체를 떠나 하늘로 흩어져 ‘천명’의 일부가 된다. 공자가 말하는 수신과 공부는 ‘귀’의 세계를 떠나, ‘신’의 세계를 바르게 갈고닦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 싯다르타, 공자가 말하는 바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권위’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 얄팍한 권위들에 사람들이 좌우되고 있다. 오늘날의 권위는 다름 아닌 팔로워와 조회수다. 이런 시대일수록 중개업자를 거치지 않고 철저하게 오리지널을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파이돈>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바로 곁의 사람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는 스스로 등불을 켜는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의 판단력을 키워 직접 진실을 궁구해나가야 한다. 아무튼 이래저래 피곤한 세상이다. 최현 번역가의 놀랍도록 매끄러운 번역에도 대단히 감탄했음을 밝힌다.


2023. 5. 27. 멀고느린구름.




제자들 앞에서 기꺼이 독배 원샷을 때리는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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