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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Oct 31. 2023

2024 총선, 우리 정치에는 T가 필요하다

시사 읽기


우리 정치에는 T가 필요하다



트위터 계정을 삭제한 뒤, 지난 1년 남짓 최대한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고자 했다. 스스로 과몰입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떨어져서 뒷짐을 지고 바라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우리 정치는 거대 양당이 늘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역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그 싸움 끝에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결과물은 거의 도출되지 않는다. 1-2개월 단위로 싸움판에 던져지는 이슈를 서로 물어뜯다가, 다음 이슈가 던져지면 앞의 이슈는 내팽개치고 우르르 새 먹잇감으로 달려들 뿐이다. 역동은커녕, 정치가 멈춘 상태다.


정치인들이 이슈를 따라 우왕좌왕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카메라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묵묵하게 우리 삶에 필요한 이슈들을 챙기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카메라 포커스에서 아웃되고 만다. 이러한 정치 행태가 박근혜 정부 시절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심화되어 왔다. 언론은 조회수 벌이가 되는 이슈를 증폭시키고, 언론 보도를 보고 시민들은 과열되고, 100석이든 200석이든 정치인들은 주목 받기 위해 하나의 이슈에 불나방처럼 모여든다. 이 악순환의 무한반복 속에서 거대 양당은 그저 상대당보다 더 세게 화를 내기만 하면 지지율을 뺏어 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해결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걸 하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듣보잡 정치인이 되거나, 싸우지 않는 당성이 결여된 무쓸모의 정치인이 되어, 다음 국회에서는 도태되고 말 것이다.


탄핵 등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싸우는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여러 시민들 사이에 굳어져버렸다. 그러나 사시사철 언제나 싸우고 있는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직장 회의에서 자기 주장만 고집스럽게 큰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이나, 길거리에서 확성기를 들고 자기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접점을 찾아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문제가 혁명적으로 일순간에 해결되는 일은 현실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판타지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정치는 우리의 현실이고 일상이다. 정치가 언제나 무슨 비장한 역사의 투쟁 현장이고, 인류의 생사를 건 결전장인 것은 아니다. 일상의 문제를 서로 논의해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T성향의 사람이 몹시 필요하다. 예전 대안학교 교사 시절에 나는 열혈 F로서 또 다른 F성향 교사의 대척점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두 사람의 논쟁으로 회의는 종종 과열되고, 길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T성향의 교사가 언제나 차분한 어조로 내 의견은 이런 장단점이 있고, 상대 교사의 의견은 이런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고 정리한 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드라이한 타협안들을 제시해주고는 했다. 대체로 거기에 나와 상대 교사가 조금씩 양보하며 살을 붙여서 최종안이 합의되었었다.


일상적 상황에서 좋은 정치인이란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T형 정치인이다. 그런 성향의 정치인이 한 사람 있다고 해서, 이 극한의 대결 정치 지형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하나의 세력으로서 ‘T형 정당’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여긴다. 총선을 앞두고 제3지대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서 이번 총선에서 제3지대는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T형 정치인으로 꼽히는 독일 메르켈 총리. 그는 보수정당 정치인이지만 여러 정당과 연정을 통해 불평등 해소와 기후위기 대비에 가장 앞장 섰다


첫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의 양극화가 최대치로 진행되어 있고, 언론은 별다른 반성 없이 관성적으로 또 선거가 진행될수록 양당의 대결을 부추길 것이기 때문이다. 무당층이 아무리 늘어났다고 해도 선택지가 둘 밖에 없으면 결국 양쪽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거대 양당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기에, 결국 치고받는 싸움을 점점 더 심화시킬 것이 자명하다.


둘째, 국민의힘은 무당층을 흡수하기 위해서, 내가 앞서 말한 ‘T형 정당’ 코스프레를 이미 진행하기 시작했다. 국민의힘보다 오른쪽에 유의미한 정당이 없기 때문에 국민의힘은 마음껏 중도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했던 바로 그 방식 그대로 시민들을 현혹할 것이고, 교언영색에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일부 시민들은 설마 또 속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승자독식 선거 제도에서는 매우 파괴력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본다. 제3지대 정당은 국민의힘에게 지지층도 잃고, 내세울 메시지도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T형 정당은 그 내용보다 정치 구도 속에서 중재역을 맡을 수 있는 제3의 정당이어야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명심합시다.)


셋째, 현재 국회에서 제3 정당인 정의당은 자칫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 가장 위기 상황인 곳인데, 가장 위기의식이 없어 보여서 별다른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현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진보’의 브랜드는 이미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했다. 지난 10년 대결에서 완패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민주당 왼쪽에 서서 생존하는 방법은 ‘민주대연합’ 밖에 없다. 지역구 경쟁을 최소화하고 민주당 지지층에게 비례대표 표를 얻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이번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정의당을 탈당한 이들이 새로 만든 ‘사회민주당’, 그리고 과거부터 민주대연합 방식을 추구했던 ‘진보당’, 그리고 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 출발한 ‘기본소득당’이 그 파이를 다 가져갈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정의당에 대한 비호감이 극심하기에 절대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정의당 현 지도부가 다급하게 녹색당과의 선거 연대를 내세웠지만, 선거공학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아주 극소수의 시민들만 관심을 가질 것이고, 선거 때 득표력은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나는 지난 대선 시기에 녹색당과 정의당의 합당을 바랐던 사람이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은 냉정하게 봐야 한다. 두 정당의 연합은 현재 시민들의 관심 밖 사안이다. 기후정치는 구호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석을 얻은 뒤에 실제 정책을 통해 시민들에게 체감시켜야 하는 일이다.


지금 정의당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가운데뿐이다. 우리 정치에서 그 가운데가 가장 크고, 가장 텅 비어 있다. 정의당이 진보의 관념을 버리고 과감하게 ‘T형 정당’을 자처할 수 있다면, 그리고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시민들을 열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면 회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궁지에 몰려 떠밀리듯 연대를 말하는 꼴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넷째, 인물이 없다. 선거는 인물 없이 이길 수 없다. 금태섭, 양향자 같은 인물이 갑자기 대선주자급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의당의 장혜영, 류호정, 그리고 조성주 같은 젊은 정치인들은 판단과 언변은 나쁘지 않지만 도무지 시민들에게 제대로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조성주 씨 같은 경우는 뽑아줘야 실력을 보여줄 것 아니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으나, 국민참여당 이후의 유시민 작가나 이준석 전 대표는 선거에서 한 번도 뽑힌 적이 없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하다못해 진중권 교수만큼의 영향력도 못 갖추지 않았나. 그리고 세 사람은 정치의 중원으로 가서 설득과 타협을 통해 실제로 일이 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데… 같은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미션부터 성과를 내야 시민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정치에 무게감 있는 T형 정치인이 있다. 심상정, 유승민, 그리고 이준석이다. 여기에 금태섭을 더하면 제법 그림이 된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이질적 조합이다. 그런데 이질적이라서 무당층 시민들에게는 재밌고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정도 자극적인 조합이라야 이슈파워로 국힘의 중도 코스프레를 막아설 수 있으리라 본다. 심상정과 유승민, 장혜영과 이준석은 서로 대척점에 있었지만, 복지국가에 대한 큰 그림, 정쟁이 아닌 논쟁을 통한 해결 방식에 있어서는 상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세세한 차이를 넘어서서, 불평등 구조 해소와 기후위기 대비를 위한 민생 중심의 T형 정당을 구성할 수 있다면, 다음 총선이 조금은 흥미로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마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외계인은 특정 정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 그 자체였다


위와 같은 조건들로 인해 현재로서는 다음 총선에서 제3지대-제3정당이 영영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면 우리 정치는 더욱 양당의 삿대질 정치의 수렁에 빠질 것이고, 미래를 위해 대비해야 할 현실적 정책 과제들은 모두 뒷전이 될 것이다. 야당은 윤석열 정부가 실패해야 정권 탈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타협의 가능성 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반대할 테고, 여당은 야당이 제출한 민생법안들을 어떻게든 흠집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생은 뒤로 한 채, 상대당의 다음 대선 주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일 게 뻔하다.


중간이 없으면, 제3의 유력한 T형 정당 없이는 대한민국 정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구조다. 우리는 이미 한쪽에 몰아주는 것을 양당 번갈아서 한 번씩 해봤다. 그로 인한 결과가 한 번은 대통령 탄핵이었고, 한 번은 정권 연장 실패였다. 삿대질 정치로 이득을 본 양당의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더 큰 힘을 달라고 외친다. 그런 논리라면 일본과 중국의 정치 체계가 우리보다 더 낫다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민주주의는 원래가 느린 정치 체제다. 세계적인 격변의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난 황소처럼 상대를 향해 달려가는 정치가 아니라, 멈추어서 신중히 생각하고, 한 수 한 수를 제대로 둘 수 있는 정치다. 다음 총선에서 바로 우리 시민들이 이 정치 지형 속에 새로운 포석을 놓아야 그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정치의 구조 자체를 명실상부한 3자 구도로 개선해야 한다. 그것이 멈춰버린 정치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모쪼록, 내 한 표를 가져갈 유의미한 T형 정당의 등장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누구의 당선을 막기 위해 하는 투표는 이제 질렸다.  


2023. 10.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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