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읽기 <창세기전 - 회색의 잔영>
얼마 전에 국산 SRPG(시뮬레이션 롤플레잉 게임)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창세기전>이 20여 년만에 리메이크되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게임기인 ‘닌텐도 스위치’ 용 소프트웨어로 해당 게임이 출시된 것이다. 창세기전이 한창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20세기말에 우리 집에는 386 컴퓨터밖에 없었다. 그 컴퓨터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갤러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내게 창세기전은 게임 잡지 속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잡지의 공략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 종종 꿈속에서 게임의 주인공인 이올린과 흑태자를 만나 피자 한 판을 나눠 먹기도 했다. 음료수가 콜라였는지 사이다였는지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긴긴 세월을 지나 비로소 직접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감개무량이었다. 오매불망 발매일을 기다리던 차에 기이한 현상을 접했다. 발매일 한 달을 앞서 공개된 체험판에 대해 온갖 악플이 쏟아진 것이다. 개발자에 대한 인격 살해에 가까운 글들이 넘쳐 나는 걸 보며, ‘사고의 극단화’ 현상이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물론, 나도 체험판을 플레이했다. 내가 판단하기에도 완성도가 뛰어나진 않았다. 그저 ‘체험판’이라는 말 그 자체로 간단히 게임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 정도였고, 몇 가지 명백한 보완점들이 보였다. 그렇다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게임을 즐기는 데 위해가 되는 요소들을 정리해 개발진에게 의견을 피력하는 정도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이 게임이 이미 망했으며, 20년 전 원작을 즐겼던 게이머들의 추억을 짓밟았으며, 이 게임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것(아, 실은 이런 말까진 보지 못했다)이라는 반응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파이어엠블렘>, <택틱스오우거>, <파이널판타지> 등 그야말로 올타임레전드 게임들과 창세기전 리메이크를 비교해 우열을 논한다. 각자 주관에 따라 그렇게 비교할 수는 있겠으나, 그건 아기공룡 둘리를 글로벌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나 피카추와 견주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체급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이번에 리메이크를 맡은 업체는 중소기업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규모를 지닌 개발팀이었다.
게임의 특성을 두고, 사안별로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종합적인 완성도의 우열을 논한다면,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을 출시한 다른 신생 게임개발사나 인디 개발사의 작품과 비교해야 적당하다.
나는 80년대부터 게임을 시작한 올드타입 게이머다. 최초로 즐긴 RPG(롤플레잉 게임)는 패밀리의 <드래곤볼 Z II>였고, 최초의 SRPG는 <제2차 슈퍼로봇대전>이었다. 부산 남포동에 있던 호키포키라는 매장에서 밀수한 게임팩을 은밀하게 거래했다. 두 게임을 날밤을 새워 즐긴 뒤, 드래곤볼은 <드래곤퀘스트 4>로, 슈퍼로봇대전은 <파이어엠블렘>으로 각각 교환했다. 어젯밤 11시 57분까지도 이어진 내 게임 인생의 위대한 여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많은 동지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여정을 멈췄지만, 나는 줄곧 콘솔 게임의 역사와 함께 동행해왔다고 자부한다. 구구절절 이야기한 까닭은 게임에 대한 내 감식안이 엉터리는 아니라는 걸 전제하기 위해서다.
<창세기전 - 회색의 잔영>은 틀림없는 수작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사고의 극단화’ 현상을 겪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1 아니면 0이라는 이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갓겜이 아니라고 해서 곧바로 똥겜이 되지 않는다. 갓겜과 똥겜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이 있다. 창세기전의 위치는 분명히 똥겜보다는 갓겜 쪽에 가깝다.
스토리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는 듯하다. 소설가로서도, 이 스토리는 정말 대단하고 보전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판타지, SF, 정치극, 무협, 멜로가 뒤섞여 있는데 그 조화가 절묘하다. 20여 년 전에도 게임 잡지에서 오직 이 스토리만을 읽고, 꿈에서 두 주인공을 만났을 정도로 몰입감이 탁월하다. 이 스토리의 가치는 직접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진득하게 즐겨 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스크린샷 몇 장, 동영상 짤 몇 개로는 전혀 체감할 수 없는 이 게임의 최고 장점이다. 스토리만 두고 견준다면 많은 이들에게 명작으로 꼽히는 ‘제노블레이드 시리즈’나 ‘오우거 배틀 시리즈’에 감히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모든 오우거 시리즈를 3회 차 이상 섭렵한 오우거 덕후다.
그래픽에서 가장 많은 혹평이 쏟아진다. 콘솔 게임기를 닌텐도 스위치만 보유 중인 나는 그런 반응이 어리둥절할 뿐이다. 닌텐도 스위치로 출시된 다른 어떤 롤플레잉 게임과 비교해도 창세기전의 그래픽은 준수하다. <파이널판타지> 근작들과 비교하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굉장히 불합리한 비교다. 업체의 규모도 그렇지만, 그 정도 수준의 그래픽은 닌텐도 스위치에서 구동되지도 않는다. 그나마 비교적 체급이 맞을 스위치 출시작으로 <브레이블리 디폴트 2>, <드래곤퀘스트 몬스터즈 3>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놓고 봐도 자연물과 빛의 묘사, 특히 물결의 표현은 창세기전 쪽이 더 놀랍도록 빼어나다. 메카닉의 디자인 퀄리티도 상당히 훌륭하다. 클래스 체인지 시에 과하지 않게 복장의 특징적 변화를 준 점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드라마의 연출이다. 애써 보완한 느낌은 있지만 조금 더 발전하면 좋겠다. 그리고 캐릭터의 눈동자 표현에 좀 더 공을 들였다면 평가가 꽤 달라졌을 것이다. 인물의 아름다움은 의외로 눈동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볼 때 언제나 눈동자부터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유저 인터페이스는 많이 불편하다. 직관적인 구조를 구축하지 못했고, 장식 요소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아마, 이 부분이 화면만으로 게임을 판단할 수밖에 없을 이들의 반감을 사지 않았을까 싶다. 나 같은 올드타입 게이머는 패밀리 시절의 초단순 인터페이스 경험이 있으니 옛 향수라도 느끼겠지만, 10 - 20대는 이게 뭐지 싶을 것 같다. 이 점은 공감이 된다.
게임성은 높은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개발진이 많은 고민을 하고,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일례로 탐색 파트에서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서, 개발진과 두뇌 싸움을 벌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에 숨겼겠지 싶으면 없고, 설마 여기는 아니겠지 싶으면 거기에 있다. 단순 패턴화하지 않고, 플레이어를 생각하며 신중히 장소를 선정했다는 걸 알겠다.
전투는 캐릭터를 육성하는 파트에선 5인 파티로 제한해서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듯이 전투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하드라마적 스토리와 부드럽게 연계되는 전술 전투는 정통 시뮬레이션 감각으로 다수의 캐릭터가 출격해 즐길 수 있게 안배했다.
전술 전투의 난이도는 슈퍼로봇대전과 파이어엠블렘의 중간 정도로 캐주얼하면서도, 방향-속성-기후-클래스 상성 등 소소한 전략성을 잘 넣었다. 슈퍼로봇대전처럼 기력을 모아 초필살기를 날리는 느낌도 호쾌하다. 또 상대를 공격했을 때의 타격감도 훌륭하다. 30시간을 넘게 하면서도 전투가 지루하다는 느낌은 전혀 못 받았다. 이렇게 설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이 개발사의 미래가 무척 기대된다.
캐릭터성은 스토리와 더불어 이 작품의 쌍두마차다. 미려한 캐릭터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각 인물에 대한 몰입감이 상당하다. 주로 지원회화로 캐릭터의 배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파이어엠블렘 시리즈와 달리 대하드라마 속에 인물의 면면이 잘 녹여져 있다. 이런 요소는 택틱스오우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캐주얼 얼굴을 지닌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는 것은 오우거 배틀 시리즈에서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2회 차 이상 플레이에서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이런 무명의 용사를 육성하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 얼빠인 나는 1회 차부터 무명의 수녀 캐릭터를 애정으로 키우고 있는데, 혼자 뇌내 망상의 시나리오를 쓰며 즐기는 맛이 있다.
게임비평을 쓰는 것은 거의 20년 만이다. 예전에 나는 GP32라는 국산 휴대용 게임기의 수호대로 활약한 적이 있다. 그 게임기로 출시된 게임이 10종이 채 안 될 텐데, 근성으로 그 모두를 리뷰했었다. 그 게임기가 명맥이 잘 유지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오늘 이 글을 쓴 이유도 <창세기전 - 회색의 잔영>이 부디 적정하게 팔려서 다음 편이 또 출시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누군가는 ‘피의 실드’를 친다고 비아냥 거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남긴 몇 줄 댓글의 힘보다, 몇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쓴 이 글의 힘이 훨씬 더 크고 소중하다고 믿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게임을 못 만들었으면 그 업체는 망하는 게 맞다고 함부로 말한다. 아무리 보잘것없게 보이는 창작물이라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건다. 비록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더라도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긴다. 당신이 당신의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러하다. 우리 모두가 쉽게 비웃고, 쉽게 욕하고, 쉽게 재단하기 전에 어디선가 그 글을 읽고 있을 당사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으면 한다. 예전엔 나도 무언가를 파괴하고 나면, 저절로 새롭고 더 좋은 것이 태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파괴하는 마음은 파괴적인 세상을 불러올 뿐이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바탕에서 격려하고, 양보의 공간을 둔 채 설득하고, 좀 뒤통수를 맞더라도 나의 선의를 굳게 밀고 나갈 때 우리는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여하튼, 스위치 게임하시는 분들 이 게임 좀 많이 사주십쇼 : )
2023. 12. 30.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