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파주 주공아파트에서 1년, 서울 연남동 빌라에서 5년을 보내고,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인천 계산동의 맨션이었다. 90년대에 지어진 노란 외벽의 맨션을 나는 오리맨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뭐라도 애써 정을 붙여 보려고 한 것이었다. 수도권 지역의 월세 매물을 40여 곳 넘게 발품을 팔아 구한 집이었다. 집의 구조가 재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월세가 30만 원이라는 점이 낙점이었다.
당시 나는 사업에 실패하여 빈털터리였다. 보증금 500만 원이 내 전 재산이었고, 통장에는 잔고가 없었다. 30대 중반에 망하고 보니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의 제목만 봐도 울화가 치밀었다. 자존감은 깊은 바다로 다이빙한 뒤 돌아오지 않았고, 타고난 긍정세포는 흑화하여 절망세포가 되어 있었다. 하루하루가 막막했던 20대 초반의 삶으로 돌아간 듯했다. 지독한 악몽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주 천천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 신촌역 앞의 동그란 화단 울타리를 부숴버리거나, 렌터카의 조수석 문짝을 날려버린 일은 있지만 나는 제법 베스트드라이버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양주톨게이트를 지나 강릉행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러브가 말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글쎄, 러브 씨가 아는 거 아녔어?”
“뭐? 난 모르는데?”
“아, 그래? 나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돌아갈까?”
“어디로?”
“글쎄, 어디서 왔지 우리가?”
물음표만 가득한 무익한 대화 끝에 러브는 한숨을 푹 쉬며 조수석에 몸을 파묻고, 휴대폰 블루투스로 노래를 선곡했다. 김동률의 ‘그 노래’였다. 노래 가사 속 어딘가에 러브의 심경이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아 귀담아 들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러브와 내 앞에는 어느새 캄캄한 바다가 펼쳐졌다. 창문을 열자 차 안은 이내 바다냄새로 가득 찼다. 그대로 바다를 싣고 러브와 나는 경북 영양까지 별을 보러 갔다.
밤하늘공원에는 우리들과 별들뿐이었다. 러브가 기대했던 쏟아질 듯한 별은 아니었지만, 희미하게 은하수의 물길이 보였다. 별은 무슨 목표로 존재하는 걸까. 갑자기 러브가 물었다. 의사나 변호사나 셀럽이 되려고? 내 대답에 러브는 쿡쿡 웃었다. 그것도 좋지. 우리는 멍하니 우주에서 내려오는 별의 음악에 번민과 시간을 맡겼다. 삶은 뜻하는 일과 뜻하지 않는 일로 구성된다. 기쁨과 슬픔은 둘 모두에 깃들었다. 그러니 뜻대로 되지 않은 삶이 곧 불행은 아냐. 만년설 같은 어둠 속에서 러브가 말했다.
내친김에 우리는 여수 향일암항까지 달려가보았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야. 내가 말하자 러브가 비웃었다. 집에 갈 땐 여기가 시작이잖아. 러브의 말이 다 맞았다. 남쪽 바다에서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행성 속에 사는 나와 항성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와 나는 황금빛으로 물든 얼굴을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뜻밖의 눈부신 순간이었다. 성공보다 수억 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게는 면허증만 있고 차가 없었지만 아무튼 위와 같은 과정 끝에 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 러브의 덕분이다.
2023. 11월 출간작 <1인 도시생활자의 1인분 인테리어> 중에서.
*알림 : 출간 도서에는 편집 과정의 착오로 마지막 문장이 잘못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 쓴 마지막 두 문장이 바른 마무리입니다.
* 출간도서 링크 = http://aladin.kr/p/xQTqS
*연관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orivi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