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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Oct 27. 2024

영구결잔

어느 하루의 이야기


영원히 사용하지 않기로 정한 커피잔이 있다. 그이와 그 커피잔을 사러 이태원에 갔던 날의 햇볕은 세상의 모든 색을 그날을 기준으로 정했으면 싶을 만큼 맑고 투명했다. 그이 또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의 커피잔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들어 올려보며, 오래된 물건이 고이 간직한 아름다움에 우리 둘은 감탄했다. 그건 70년이 넘은 잔이에요. 그건 100년 더 됐을지도 몰라요. 앤티크샵 주인의 말을 들으며 그이와 나의 사랑도 70년 이상 머물기를 소원했다. 그이는 붉은 단색 도료로 꽃송이가 그려진 영국 커피잔을 골랐다. 나는 그이에게 "이건 00 씨의 커피잔이에요 영원히"라고 말했다.


그이가 집에서 모든 물건을 챙겨 떠날 때, 그이는 더 이상 나를 마주하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나는 홀로 동네 강변에 나와 물결에 흔들리는 오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는 그이와 나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무지 아무것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이다. 그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어서, 나는 커피 한 잔을 내려 영원히 그이의 것이어야 할 커피잔에 담아 테이블에 올려뒀다. 내 마지막 소원은 그이가 그 커피를 마시고 떠나는 것이었다. 다시 집에 돌아와 빈 서랍과 빈 잔을 마주했을 때, 혼자 먼 외우주를 항해하고 돌아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영원의 커피’는 사라졌고, 세상은 내가 지구를 떠날 때와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그이의 커피잔 바닥에는 짙은 얼룩이 남았다. 한때 내가 알던, 이제는 사라진 세상의 증거다. 그것만은 영원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 모습 그대로 그이의 커피잔을 ‘영구결잔永久缺盞’으로 정해 안전한 곳에 두었다.


커피잔을 들어 올릴 때, 흔들리는 까만 물결이 이따금 수 억의 별이 담긴 우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모든 태어난 것의 희로애락은 신이 들어 올린 커피잔의 물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극히 우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죽음이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건이 나를 덮쳐 올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만은 또렷하다. 우리는 미래를 살지도, 과거를 살지도, 심지어 현재를 살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무엇을 둘지 정하는 일이 주식 투자만큼이나 중요하다. 사람이 마음에 너무 많은 것을 두면 강퍅해지고, 마음에 아무것도 두지 않으면 얄팍해진다. 이미 지나간 것 중에, 나는 타인에게서는 아름다운 기억을, 내게서는 추한 기억을 남겨두었다. 그러면 다가올 날 속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조금 더 분명해진다. 나에게서 추한 것을 떼어내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긴 세월에 걸쳐 고작 몇 그램을 덜어냈을 뿐이다. 자신의 한계에 실망하고, 덧없는 삶에 무기력해질 때면 이따금 ‘영구결잔’을 떠올린다.


푸른 새벽 어스름빛 속의 소녀는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고 했다. 거실에는 재즈 음악가 말로의 ‘여름, 그 물빛’이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2인용 소파에 기대어 앉은 소녀는 새벽별 같았다. 커피 마실래요? 응. 여느 날처럼 변함없이 나는 커피를 내렸다. 붉은 꽃송이 무늬 커피잔에 르완다 원두커피를 담아 소녀 앞에 놓았다. 소녀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이내 반짝 미소 지며 말한다. 최고의 맛이에요.


2024.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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