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미스터 츠구미’
미라는 정확히 작전 개시 1시간 뒤에 이제 집에 가야겠는데 버스가 없는 것 같다는 멘트를 투척했다. 준철은 내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이미 준철의 뇌에 내가 타고 가야 할 버스에 대한 우려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이 다니니 조금 더 있다 가겠다고 전했다. 미라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 떠났다. 준철이 내게 목례라도 했던가 안 했던가. 아무튼 그는 허무할 정도로 쉬운 남자였다.
반면, 미스터 츠구미는 쉽지 않았다. 준철이 떠나면 곧 자리로 와서 내게 말을 걸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보기에 일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카페 마감을 30분 앞둔 밤 10시 반 경이었고, 손님은 정확히 나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그냥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딱히 츠구미와 말을 섞고 싶어 남은 건 아니었다. 아니 그랬던가. 미라가 남기고 간 노르웨이안 우드를 내 유리잔에 부으니, 바닥에 0.1% 남은 커피와 섞여 언젠가 다큐에서 본 두만강 하류와 비슷한 탁색이 됐다. 꼭 내 인생의 빛깔 같았다. 도대체 무얼 위해 사는 건지. 사랑을 위해 살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때 귀에 익은 선율이 먼 물결 소리처럼 들려왔다.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
평일 저녁 8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K와 나는 여수 밤바다를 보러 떠났었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여름이다. 예정되지 않은 교통사고 같은 여행이었다. 그때 우리의 심장은 여름보다 훌쩍 뜨거웠다. 듬성듬성 빈 객실칸 끄트머리 좌석에서 우리는 내내 서로를 더듬었다. 열차는 아랑곳없이 우리를 여수의 새벽에 데려다 놓았다.
역을 나서자 후끈하고 비릿한 공기와 검은 봉고차에서 내린 포주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혼자 온 사내 몇이 어둠 속에서 포주들과 흥정을 했다. 봉고차 안에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앉아 있었다. K와 나는 서둘러 택시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머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지러웠다. 그때 아주 희미한 파도소리가 들렸고, K의 후각과 내 청각에 의지해 바다로 향했다. 곧 낡은 항구가 나왔고, 해안로를 따라 해변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또 걸었다. 그믐달 모양의 검은 모래 해변에 이르러 우리는 멈췄고, 별빛이 너울대는 바다 곁에서 오래오래 입을 맞췄다. 내 청춘은 그 입맞춤으로 완성되었고, 그 입맞춤과 함께 스러졌다. 그리고 아침에 공교롭게도 우리는 가까운 식당에서 쭈꾸미볶음을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쭈꾸미볶음은 처음이야, 너랑 함께여서 그런가 봐. 해사하게 웃던 K의 얼굴은 그렇게도 잊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