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미스터 츠구미 2

소설 ‘미스터 츠구미’

by 장명진


곧 츠구미가 메뉴판을 들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부디 못 알아보기만을 바랐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츠구미가 내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아… 아아, 네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지는 나도 몰랐다. 준철이 여기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메뉴판을 거꾸로 든 채로 아아 그런 것 같다고, 이름을 기억 못 했는데, 와본 곳 같다고 답했다. 준철은 조금 김이 샌 듯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도 같은 걸로 주문했다. 그럼, ‘북극의 연인’ 두 잔 드리겠습니다. 츠구미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뒤늦게 메뉴판을 살피던 준철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북극의 연인’이란 이름으로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준철은 유별나다고 평했다. 나도 동의했다. 준철은 이어서 방금 메뉴판 들고 온 사람이 사장이며, 일본인인 걸 아냐고 물었다. 아… 그래요?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아… 예에. 그러네요. 좀 잘 생긴 것 같다며, 자신과 둘 중 누가 더 낫냐는 질문까지 할 때는 숨이 턱 막혔다. 츠구미의 외모에 대해 깊게 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준철과 투샷으로 놓고 보니 솔직히 츠구미 쪽이 조금 나았다. 하지만 나는 예의를 중시하는 편이었으므로 상대가 원하는 바대로 준철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츠구미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준철이 그렇죠? 라며 웃었다. 그래, 그걸로 됐다.


일렁이는 푸른빛과 섞여 공간을 떠도는 음악도 무언가 남달랐다. 이렇게 표현하면 적당할 것 같다. 우주음. 낮고 여린 소리들이 묘한 태고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모든 생명은 우주에서 왔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준철도 며칠 전에 비슷한 내용의 유튜브를 봤다고 맞장구를 치며, 스마트폰 음악 검색 기능으로 푸른빛에 섞여 있는 음악의 이름을 추출해냈다. ‘아스피디스트라플라이’라는 묘한 이름의 싱가포르 밴드라고 했다. 아, 그래요. 나는 대답했고, 준철과 나의 대화는 아랑곳없이 음악은 시공을 푸른빛으로 적시며 너울거렸다. 내 시선은 조리대에 서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는 츠구미의 손, 까만 드립포트를 가볍게 쥐고 있는 그 긴 손가락들에 하나하나 머물렀다. 준철이 자신은 ‘북극의 연인’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 그래요. 준철은 그 영화가 자기 인생에 손꼽히는 명화 중 한 편이며, 언젠가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아, 좋죠. 그렇게 답하며 츠구미가 별 모양으로 얼린 얼음을 유리잔에 넣는 걸 곁눈질로 보았다. 곧 얼음별이 담긴 북극의 연인 커피 두 잔이 우리 앞에 놓였다. 맛있게 드십쇼. 츠구미가 말했고. 감사합니다. 내가 답했다.


미라는 준철이 커피 속 얼음별을 오독오독 씹어먹고 있을 즈음 등장했다. 서늘한 가을밤이었지만 미라는 가슴골이 엿보이는 꽃무늬 여름 원피스로 준철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게다가 미라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직장에서는 걸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을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철이 말했다. 장원영 닮으셨어요. 미라와 나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키득 웃었다. 커피가 나온 직후 준철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화장실에 들러 미라에게 자초지종은 이미 전달해둔 상태였다. 그 쭈꾸미 가게라고?! 휴대폰 너머 미라의 목소리는 이미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츠구미가 다가와 미라에게 메뉴판을 건넬 때, 미라는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노르웨이안 우드’로 주세요, 근데 사장님 정말 미남이시네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미라의 특급칭찬에 더 흔들리는 쪽은 오히려 준철이었다. 저런 스타일 좋아하세요? 준철의 말에 미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쁘지 않죠라고 답했다. 준철은 벌써 미라에게 푹 빠진 느낌이었다. 나는 몰래 미라에게 카톡을 보냈다. 폭탄제거반, 오늘의 미션 대상 = 상철. 라져 +_+/ 미라의 짧은 답은 더없이 믿음직했다. 미라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유명한 노래처럼 10분이면 충분했다. 준철의 시선은 마치 감시 카메라처럼 미라를 쫓았다. 가끔 나를 살필 매너조차 망각한 모양이었다. ‘실수로’ 시선이 부딪쳤을 때 준철의 눈빛은 이것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최대한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준철은 미라의 노르웨이안 우드(냉 녹차)를 가리키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원제가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꺼냈었다. 오, 정말요?! 미라가 감격한 듯 성실하게 맞장구를 쳐주자, 준철은 대단히 흡족해했다. 미라는 하루키의 책을 내게 처음 권해준 사람으로, 미라의 집에는 세계 각국에서 출간된 다양한 버전의 <노르웨이의 숲>이 있었다. 비틀즈의 명곡 ‘노르웨이안 우드’가 수록된 <러버 소울> 오리지널 LP도 소장 중인 미라였다. 준철은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이 알고 있는 얄팍한 하루키 위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라의 연기는 탁월했다. 너무 재밌어서 10분이 1분처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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