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독
마침, 비틀즈의 예스터데이(Yesterday)가 끝나고 노라 존스의 돈 노 와이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어.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어. 아빠가 나나 엄마에게 나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야. 오히려 자상하고 다정한 좋은 아빠였지. 그러나 아빠는 결코 그 역할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어. 난 아빠와 단 한 번도 바다에 간 적이 없는데 말야, 아빠 장례식이 끝난 날 엄마랑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는데, 갑자기 엄마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더라고. 그러면서 그러더라. 아빠가 사랑했던 여자가 거제도 바다에 잠겨 있다고. 아직도 그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아빠의 사랑은 그 여자의 시체와 함께 거제도 바다에 잠겨 있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어둠에 물든 밤바다를 보고 있으면 이십대 초반, 우리들 나이 또래에 죽은 그 여자의 모습이 수평선 너머에 떠올라. 그 여자는 수평선 위에서 초록의 아련한 빛을 발하며 참방참방 춤을 추고, 언어가 없는 노래를 불러. 바다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그 속에 숨겨두고 있겠니. 세이렌의 전설 따위가 이어져 오는 건 당연한 거야.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평균 수명의 3분의 1도 안 되는 지점에서 생을 그치고, 어떤 이는 3분의 4까지도 초과해서 살지. 나의 인생과 아빠가 사랑했던 여자의 인생이 다른 점은 무얼까. 죽음으로 명확하게 끝나버리는 인생도 있지만 그 인생이 끝난 지도 모른 채 끝나버린 인생도 있어. 지루한 스텝롤만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야만 하는 인생 말야. 내가 출연할 틈도 없이 영화는 금세 끝나버리고 그 영화에 출연했던 이들의 이름이나 들여다보고 살아야 하는 인생.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그런 인생을 살아. 이미 인생이 끝나버렸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지.
여운아, 너의 인생은 계속되고 있니. 나의 인생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 있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된 적이 없었어. 아빠의 인생도, 엄마의 인생도, 그리고 나의 인생까지 스물세 살에 죽은 아빠의 첫사랑, 그 여자의 질량이 만들어낸 중력에 이끌려 거제도 바다 속에 속박되어 있는 것만 같아. 우리 가족은 누구도 진심으로 행복할 수 없었다고 엄마는 한참을 울었어. 우리는 아빠의 시체를 화장해서 거제도 바다에 뿌렸어. 아빠는 한 번도 그런 유언을 남긴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했어. 그날 밤 거제도 바다에는 거대한 보름달이 떴어. 우주에서 바라본 위성 같은 달이, 세계 곳곳에 숨어 있을 늑대인간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듯한 서늘한 빛을 내뿜는 달이었어. 내 몸속의 털까지 자라날 것 같았어. 엄마는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이 축제를 한다고 소녀처럼 말했었어.
엄마를 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않고 싶다고 다짐했어. 그리고 지난 모든 것과 인연을 끊고, ‘고요'가 아닌 새로운 나의 인생을 시작해야지 싶었어.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과거의 너에게 편지를 써. 나는 현재의 너를 모르니, 과거의 네가 수신자가 될 수밖에. 사람들이 쓰는 편지는 모두 과거의 사람에게 향하는 거야. 편지를 쓰고, 고치고, 편지봉투와 우표를 고르고, 우체통을 찾고, 우체국에 도착한 편지가 우체부의 가방 속에 들어간 채, 오토바이, 자전거, 트럭, 배, 비행기, 심지어 우주선까지 각종의 탈것에 실려 어떤 주소들에게로, 그 주소 속의 이름들에게로 전해져. 그러는 동안 편지 속의 이야기도, 편지를 받는 이도, 그리고 편지를 쓴 이마저도 모두 과거가 돼. 그러니 이해하길 바래.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나는 새로이 인생을 시작하기 전의 ‘나'일지 몰라. 네가 이 편지를 받고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너를 못 알아볼지도 모르고 알면서도 모른 채 할지 몰라. 네가 알던 ‘고요'와는 너무도 다른 나를 너는 만나게 될 거야. 서운하겠지만. 이 편지를 받는 너 역시 과거의 여운이는 아니겠지. 지금의 너는 나와의 기억도 흐릿해지고, 네가 내게 준 바닐라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찾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만약에… 나의 남자친구의 새 연인이 되어 있어서 내 얘기라면 정색을 하게끔 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해해줘. 이 편지는 과거의 내가 과거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야.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이고 눈빛과 몸짓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이인 거야. 너는 나의 필체와 잉크의 번짐 따위로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때의 내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거야. 뱃고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우리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함께 갔던 남해의 창백한 바다를 떠올리겠고, 아빠의 첫사랑을 이야기한 부분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지고, 눈시울이 젖어들지도 모르겠어. 아무리 커다랗고 무거워 뵈는 구름도 결국에는 흘러가게 되어 있어.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연도,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크고 아름답다 해도 지나가기 마련이야.
여운아, 그렇다면 사람은 결국 지나가버리고 말 이 순간을 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결국은 흘러가고 흐릿해질 인연에 마음을 다하게 되는 걸까. 난 너에게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또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그곳에서 이곳으로 왔지만… 그곳과 이곳은 정말 다른 곳이었을까. 이곳에서 생겨난 구름이 조금 늦게 그곳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생겨난 구름이 이곳에 조금 작아진 모습으로 도착한다는 차이일 뿐. 아빠가 죽은 세상과 아빠를 제외한 모두가 죽은 세상은 서로 다른 곳일까.
창 밖에 작은 불빛들이 다가오는 게 보여. 아프리카에서 온 배들, 혹은 아시아, 아니면 아메리카에서 온 배들이 검은 파도 위를 미끄러져 오고 있어. 나는 눈을 감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집중해.
"나의 세계는 변하지 않아... 나의 세계는 변하지 않아..."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비틀즈의 음악은 시간의 우주를 가로질러 나에게 와. 모쪼록 이 편지도 모든 것을 가로질러 너에게, 진정 너에게 가닿기를 기원해. 부디 안녕하길. 안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