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원,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 지난 편에서 '맞는 의사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라고 투덜대기가 무섭게 의사와 난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위선자란 말을 빙빙 돌려 이야기했고, 나는 일주일 내내 동 단어에 집착하며 심란해하다 한주에 세 번이나 정부청사를 방문했다. 정사각형 기둥의 오묘하게 생긴 부서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문득 주변이 광화문임에도 그곳이 얼마나 조용한지를 깨닫고 움츠러든다. 나는 그 행위가 마치 무엇인가를 확인해주기라도 하는 양 굴었다.
인정한다. 의사의 촌철살인에 화가 났다. 고작 세 번 본 사이에 내뱉기엔 무례한 말이라고 느껴졌다. 상담자-내담자 관계서 힘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게 그가 아닌가. 시쳇말로 '갓생'을 살아오신 80년대 의사선생이 보기엔 게으른 MZ세대 백수인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겠지. 그가 지적하는 것들을 과연 내가 고민해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끝없는 자기혐오가 애초에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도통 의문이었다. 지난 병원을 다니다 만 이유가, 의사에게 혼나는 것 같아 방문 때마다 긴장하고 수치심이 들어서라고 말했음에도, 대체 내 이야기를 어느 귓구멍으로 들은 건지. 그러나 싫은 티를 낼 수 없었다. 자라온 환경 탓에, '선생'이라 불리는 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을 보내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래, 정신과 의사가 틀릴 확률보다 내가 틀렸을 확률이 높지 않겠어. 번갯불에 콩 굽듯 주치의가 좋았다고 했다가 싫다고 번복하기도 민망하잖아. 솔직히 비겁하고 위선적인 것도 맞고.
그의 말에는 분명 옳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사가 전혀 내 상황에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양의학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고통에 심적으로, 정서적으로 공감해야 할 의무가 있던가? 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우울증 경험자라고 해서 다른 환자들을 반드시 이해하리란 보장이 없듯이, 정신과라고 해서 본인의 예민함과 공감성 수치까지 높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까지 찾아봤던 자료와 여러 책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도 비슷했다.
정신과는 심리상담이 아니니 사담이나 공감을 바라지 말라. 의사가 팩트 폭격을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하고, 진료시간에는 약과 관련된 객관적인 차도만 이야기하자.
특히 저런 조언이 의사들이 쓴 글보다 실제 우울증 환자들이 쓴 글에서 압도적으로 자주 보인다. 의사들이 보는 정신과 환자와 환자가 보는 정신과 의사의 온도 차이가 이토록 크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논할 자격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환자 입장에서 변명해볼 뿐이다. 심리상담은 여러가지 의미로 비싸다. 시간, 비용적 측면서 정신과보다 훨씬. 학생 때야 대학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지만 졸업하는 동시에 접근성이 크게 떨어진다. 혹자는 병원과 상담소의 병행이 가장 좋다지만 그건 여유 있는 자들의 이야기다. 돈 많기로 유명한 연예인도 의사 하나 잘못 만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마당에 일반인은 오죽하겠는가? 돈 없는 백수지만 그나마 부모덕에 일주일에 만오천원이나 하는 약값을 감당하기라도 하지. 상담까지 가기엔 더는 쥐어짤 용기도, 가족에게 폐를 끼칠 배짱도 없다. 오랫동안 한 선생님과 상담을 해보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노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어 더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다. '항우울제'란, 유쾌하지 못한 어감과는 별개로 가장 접근성 좋고 싸게 먹히는 가성비 좋은 수단인 셈이다.
오늘 아침엔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선생님은 내가 이 시험을 포기하거나 완전히 올인하지 않는 이상 절대 그 무엇도 바뀌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굳히신 듯했다. 결정을 내린 사람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른이 하시는 말씀에 '네, 네'하며 맞장구를 칠 수밖에. 그는 자꾸만 내 결정이 가족과 타인을 위한 보여주기 식 쇼라고 하셨다. 외교관이 간절한 친구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며, 모종의 기만이지 않냐고.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백지상태일 순 있지만 그게 길어지면 시간 낭비 아니겠냐고. 하지만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 한주의 절반을 광화문에 머물며 느낀 것은 개인주의가 심한 나라도 현재로서는 소속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점,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게 그다지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는 점, 모든 걸 다 떠나서 이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선생님이 비판하신 '선택'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 반대급부는 무엇인가? 간절히 원하는 직업에만 지원해야 하는가? 내가 독하지 못하다는 걸 꼬집고 싶으신 건가? 지금껏 봐온 바로는, 한국 시험은 간절함이나 적절함 내지 적합성과는 거리가 먼 보상을 내리는 시스템이었다. 고민하느라 시간 낭비만 한다는 비난이 내 악몽의 가장 흔한 주제라는 건 아실까? 벽에 대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속이 더 시원하겠다. 진료실에서 더 이상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허둥지둥 나오는 길, 그의 눈앞에서 자존심 상하게 울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승강기를 기다리는 내내 멍청하게 서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오늘 저 진료실 안에서 의사와 내가 동의한 문장은 하나였다. 정신과나 약은 임시방편이다. 약과 병원 방문에 대해 집착하거나 고집을 부릴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일 뿐.
약봉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오는 길. 며칠 전 머리를 짧게 쳤고, 내일은 생일이지만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며 모든 걸 희생하는 학생들이 있잖아요'란 그의 말과 '넌 독하질 못하니 할 수가 없는 거야'란 어머니의 말이 겹쳐졌다. 시험을 앞두고 감상적이지 말란 강사의 말도 갑작스레 기억났다. 그래, 진료에 굳이 감상적일 거 없어. 1층 약국엔 각종 병원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난 약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또다시 일주일이 시작됐다. 다음 주엔 병원에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소통 문제가 있고 나서 잠시 브런치 주소를 알려드릴까, 란 생각도 했었지만 접었다. 그가 나에 대해 알 필요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