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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jaroazul Apr 28. 2022

자해라는 소설

정신과 일기 - 4

 가위는 의외로 무디다. '자른다'는 행위에 최적화되어 있는 만큼, 베거나 긁어내는데 적합하지 않다. 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커터칼은 몇 달 전 교보문고에 가서 산 것이다. 같은 값이라면 전문가용이 낫겠다 싶어 샀더니, 날이 훨씬 날카롭고 경사져 있었다. 택배를 여는 데는 요긴했으나 위험했다.


 그래서 가위를 택했다. 가위를 가로로 눕혀 긁는다. 노란빛이 돌던 피부는 금세 핑크색이 된다. 알코올 솜을 문댄 것마냥 시원하다. 하지만 진정 개운치가 않다. 날을 조금씩 기울여 긁어본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피부는 별 반응이 없다. 이내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너무 안전한 도구다. 산 지 오래되기도 했고, 이렇게 눕혀서야 이태리타월과 다를 게 없잖아. 역시 고전이 최고인가? 피부와 날의 각도를 줄여나다. 이쑤시개로 그은 듯 자홍빛 색 선이 나타난다. 여전히 별 느낌이 없다. 통증도 없다. 그래도 아까보단 낫다. 뭔가 흔적이 나타나는 쪽이 덜 지루하다.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자해는 칼로 손목을 긋는 식으로 이뤄진다...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마치 상의한 듯이 대부분의 환자들이 같은 방식을 택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겁쟁이라 그런가? 칼은 진부하지 않나. 위험하기도 하고. 그러다 동맥이라도 건드리면 어쩌려고.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물리적인 때리기였다. 벽에 가져다 박거나, 주먹질을 하는 것. 베인 상처에 비해 숨기기도 쉬웠고, 댈 핑계도 많았다. 죽도록 팬다-그 편이 속이 시원했다. 피멍이 들 정도로 때리면 멍의 색깔이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었다. 그걸 관찰하는 건 나름 재밌었다.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뒤로 갈수록 노란색. 여러 색이 섞여 나타날 때는 안드로메다 은하나 말 모양의 성운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로 옷에 가려지는 부분들이 편했다. 다리가 가장 만만다. 덤으로 종아리는 벨 수도 있다! 손목에 비해 종아리를 베는 건 생각보다 드라마틱하지 않거든. 손톱으로 긁어 피가 날 때까지, 살이 움푹 파여 살갗이 벗겨질 때까지, 나무 꼬챙이가 부러질 때까지. 민트를 먹었을 때처럼 따갑고, 화하다. 벽돌이 노출된 벽에 돌진하거나 머리를 박을 땐 종종 웃음이 터지곤 했다. 제삼자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고층건물 유리벽에 머리를 박는 참새 같아 보이겠지.  


 지난번 때에는 조금 과했다. 힘 조절에 실패한 탓이다. 분노와 힘 조절은 반비례한다.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날 밤 허벅지 쪽에 경련이 왔다. 양쪽 팔은 쓰라렸고 다리는 통증이 심했다. 소염제를 먹었지만 아파서 잠에 들지 못했다. 방식을 바꿀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 낸 게 가위였다.


 문제는 여름이 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가위가 닿는 곳이 의외로 좁았다. 실험 삼아 팔에 해봤지만 얼룩덜룩해질 뿐이고, 경험으로 미뤄보건대 남들이 발견해봐야 성가시다. 5년 전 벽돌로 찍어 내린 손가락 관절의 흉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허벅지나 배처럼 지방이 많은 곳은 보람이 없는데. 말마따나 덜컥 잘라내도 지방제거술 아니겠어?


 언젠가 엄마는 주사도 못 맞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타투받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칼로 벨 거라면 기왕 잉크 묻은 바늘로 피부를 찌르되 뭐라도 남기는 편이 낫지 않겠나, 란 심보였다. (멋을 위해 받은 타투도 아니었다니, 얼마나 찌질한가.) 결심이 무색했다. 하고 싶을 때마다 타투를 받았더라면, 내 상반신은 진즉에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처럼 꽉 차있어야 한다. 이즈음에 이르면 웃음이 나온다. 정말 재밌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제거 행동 없는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줄 알고 있는 주치의나, 백날 설명해봐야 하지 말라고 발작하는 주변이나, 처음으로 건넨 나의 신뢰를 쓰레기통에 아무렇지도 않게 처박아버린 그 사람이나 이게 이렇게 재밌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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