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ajaroazul
May 17. 2022
1.
부모님을 닮고 싶지 않다. 당신의 인생은 세간이 말하는 훌륭한 삶의 표본이었다. 적당한 자수성가, 편차 없는 세 자식들, 큰 우환없는 환경.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 아이들을 낳았고, 꾸준히 노동하며 도의적인 책임을 다했다. 조금씩 나빠지는 건강과 약간의 우울증이 걱정스럽지만, 다들 이러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당신이 낳고 기른 자식에게 "살기 싫다"라고 편하게 투덜거리지도 못한다면, 애초에 애는 왜 낳는단 말인가?
2.
친구들을 닮고 싶지 않다. 그들은 무심했고,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는 사람 막지 않았고 가는 사람 잡지 않았다. 늘 내가 전전긍긍하는 쪽이었다. 선물을 받고 기뻐할 친구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고, 자기 사정이 나빠도 베푸는 데 인색하지 못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나를 유난스럽다고 놀리며 살았더랬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애정은 화수분이 아니었다. 드디어 호구의 곳간이 파산한 것이다. 텅텅 빈 창고 앞에 망연자실 서있는 주인 옆엔 아무도 없었다. 놀라우리만치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쩌다 파산 소문을 들은 지인들은 '봐, 저렇게 살면 안 돼.'라며 안도했고, 자신의 창고를 더 꽉 조여 닫을 뿐이었다.
3.
전 사랑들 또한 닮고 싶지 않다. 이성과 균형 잡힌 관계를 맺은 기억이 없다. 늘 상대가 더 무겁거나 내가 더 무거웠다. 전 애인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신뢰를 요구했다. 소꿉친구였던 아이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삶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들과 만났던 시간, 이유, 모습은 천차만별이었으나,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같이 나에 대한 예의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본인이 얼마나 최악인지에 대해-적어도 최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에 대해-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자신의 최악을 의심하는 건 늘 나였다. 바보 같았다. '내가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라고 중얼대다 보면, 종장에 정말 악당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흉이 늘어갔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다른 기억들에 비해 잘 잊히질 않았다. 갈수록 사람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믿음의 부재만큼 의심이 배양되기 최적인 환경이 없다.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4.
의사에게 주말에 자해를 했는데 굳이 보고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고 한다. 내 성격 때문일까? 범불안장애 때문에? 아니면 최근 화두였던 폭식증을 보고 짐작했던 걸까? 그는 폭식증이 외모에 대한 강박인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스트레스 해소의 일환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소거 행동을 하지 않는 나는 후자이리라. 의사는 어떤 걸로 자해를 하냐고 물었다. 갑자기 수치심이 몰려왔다. 손과 가위를 주로 쓰고 칼은 쓰지 않는다고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바지에 실수를 해서 쩔쩔매는 10살짜리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 사실 도구는 잘 들질 않는다고, 오랜 시간 손으로 해오다 보니 그쪽이 훨씬 편하다고 농을 던졌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언제부터 했어요? 기억이 시작되는 한 아주 어릴 적부터요. 아무도 안 막던가요? 아기 때는 그게 뭔지 몰라서, 감정 표현으로 했던 거 같아요. 할머니나 부모님이 저지하긴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그게 자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숨기기 시작했어요.
5.
항우울제나 불안제 덕을 볼 때 가끔씩 '약이 최고야!'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자해도 비슷하다. '자해가 최고야!'란 생각이 들만큼 효과를 볼 때가 있거든. 기분이 전보다 훨씬 나아지니까. 누구를 찌른다거나, 애먼 가족들에게 사자후를 지른다거나, 억지로 누른 분노가 며칠 동안 썩은 내를 내뿜는 대신, 몇십 분의 작업으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의사는 폭식이든 자해든 기저 메커니즘이 같다고 지적했다. 뭐든 간에 하는 중간에 멈춰보라고, 먹던 건 아깝더라도 버려버리고, 살을 긋다가도 멈춰보라고 조언했다. 열심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들어먹을진 모르겠지만, 날 걱정하는 건 눈앞에 이 사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적지 않은 돈을 받고 마땅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 그를 향한 환자의 부질없는 기대이자 부풀려진 호감, 하지만 그쪽에 몸을 기대는 편이 나았다. '소중한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이, 그 사랑을 받는 '나'라는 존재가, 그보다 훨씬 별스럽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