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일기 - 6
내 생일인 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이다. 사주팔자에도 물의 기운이 가장 강하다고 나온다. 하지만 나는 물이 싫다. 10대 시절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수영 과외까지 받았으나, 겨우 시늉만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정적인 신체는 물 안에서 더 둔해졌다. 어영부영 자유형을 해냈을 때도, 호흡이 편해졌을 때도 수영이 진심으로 좋았던 적은 없다. 유리창 너머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엄마를 보며 억지로 미소 지었지만, 수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의로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가지도 않는 바다에 빠질 경우를 대비한 생존 훈련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마저도 100일을 못 넘겼지만.
그리고 현재, 필자는 수영을 못한다. 물에 뜨는 건 될 거다. 그 외엔 어림도 없다. 비싼 강습료를 낸 엄마, 미안. 그렇지만 먼저 배우겠다고 나선 적도 없는 걸. 엄마와 여동생이 좋아했던 거지, 난 차라리 사교댄스를 추거나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치는 쪽이 재밌었다.
최근에 책을 읽다가 '이중우울증'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원체 성격이 우울한 사람이 외부환경으로 인해 우울감이 상승할 경우 오는 병이란다. 원체 냉소적/부정적/불안한-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수식어를 붙이면 된다-인간인지라, 의외로 우울감이 찾아왔을 때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또 누구나 살면서 느끼는 감정 아닌가 싶고, 괜히 셰익스피어 주인공마냥 호들갑 떤다는 죄책감마저 든단 말이다. 멜랑콜리, 패션 우울증, 홍대병... 병원에 들락날락 거리는 지금까지도 '우울증'이란 병은 영 와닿질 않는다. 시발, 살면서 안 우울한 사람이 어딨어? 다 연탄 구매처랑 렌터카 비용 정도는 기억해두면서 사는 거 아니야?
나의 우울증을 비유해보자면,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가라앉는 기분이다. 정확히는, 발이 해초 혹은 귀신 따위에 잡혀 서서히 끌려 들어가는 양상. 언급했다시피 난 물 자체가 싫다. 굳이 수면 아래로 잡아끌지 않아도 물에 몸뚱이를 담근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란 뜻이다. 불쾌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라앉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악을 쓰다 부모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이처럼, 발이 묶여 잡혀가는 것이다. 이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탁한 물속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공격할 바에야, 영화 <127시간>의 프랑코처럼 칼로 제 발목을 자르는 편이 낫겠단 판단이 들기 시작한다. 아마 현실에서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우는 일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살고자 할 때만큼 자살이 매력적인 순간도 없다.) 우울을 유발하는 환경과 사람은 개인이 바꾸기 어렵지만, 어느 곳에서 어떻게 죽을지,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남길지는 스스로 결정하고 정리할 수 있으니까. 죽음이야 말로 우울이란 괴물을 통제하고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궁극의 해결책이 아닐까?
코미디언인 테일러 톰린슨이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기분장애가 있는 건 마치 수영을 못하는 것과 같아. 남한테 말하기 쪽팔릴 수도 있고 원하는 곳까지 가는데 애를 먹을 수도 있지. 그런데 튜브는 뒀다가 뭐하게? 팔에 끼고 어디든 가면 될 거 아니야. "사람들이 튜브 낀다고 흉보면 어떡해?"라고 걱정하는 놈들, 잘 들어. 어차피 그런 인간들은 네가 죽든 살든 X도 신경 안 써. 그니까 그냥 튜브 끼고 다니라고. 수영할 줄도 모르면서 괜히 맨몸으로 뛰어들어서 네 문제를 온 동네 문제로 만들지 말고.
테일러에게 한가지 궁금한 건, 나한텐 '약'이란 튜브 외에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있단 거야. 가끔씩 그걸로 양팔에 낀 작디작은 튜브를 찌르고 고기밥이 되고 싶을 땐 어째야 하냐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