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후 운전면허를 땄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를 연출한 육상효 감독이 최근 임권택 감독과 나눈 전화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육상효 감독은 과거 임권택 감독의 <축제>에서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신작 시사회에 임권택 감독을 초대하려 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건강 문제로 참석이 어려웠다. 개봉 후 직접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후 자신이 생각한 영화의 좋은 점들을 이야기해주려 한 것이다. 나는 <나의 특별한 형제>를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보도된 임권택 감독의 소식에서 9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사실 9년 전 그날 이후 ‘임권택’이란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다.
2010년 8월 그때는 <씨네21>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날 내가 맡은 일은 정성일, 허문영 평론가가 참여하는 ‘씨네산책’ 코너의 진행과 정리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임권택 감독의 전작전을 열기로 했고, 그에 따라 산책의 주인공은 임권택 감독이었다. 본격적인 대화 전, 우리는 자료원 상영관에서 영화를 봤다. 임권택 감독의 1971년 작 <원한의 거리엔 눈이 내린다>였다. 196,70년 당시 대부분의 한국영화감독이 그랬듯이 임권택 감독이 ‘다찌마리’ 영화를 만들던 시절에 연출한 작품이다. 두 명의 평론가는 이 영화에서 영화적인 매력을 발견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언제나 과거의 작품들을 ‘원죄’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원한의 거리엔 눈이 내린다>를 통해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면서 그때의 자신에게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상수동 주변의 어느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2대의 차량으로 나눠서 이동하기로 했고, 어쩌다 보니 나는 임권택 감독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얻어 타게 됐다. 나는 보조석에, 뒷좌석에는 정성일 평론가가 앉았다. 상암동에서 상수동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지만,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가장 어린 사람으로서 뭔가 대화를 꺼내야 하나 싶던 찰나, 임권택 감독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성일 선생은 직접 운전을 하는 편인가요?"
정성일 평론가는 멋쩍게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운전을 거의 못한다”고 답했다.
다시 침묵이 이어질까 싶어서 나도 그때 말을 꺼냈다.
“사실 저도 운전을 못합니다. 그래서 주로 여자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때 내 나이 32살이었다.)
다행히 정성일 평론가가 그 말을 또 받아주었다.
“사실 저희 집에서도 아내가 주로 운전을 합니다.”
임권택 감독도 웃고, 나머지 사람들도 웃었다.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임권택 감독이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마디를 꺼냈다.
"그래도 운전을 해야 돼요.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 지금은 댁들이 젊어서 모르겠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아, 그때 '임아무개'가 한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할 때가 올 거요."(웃음)
30대가 넘어서도 운전면허가 없었던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미 '남자는 운전!'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은 터였다.(지금은 운전을 할 줄 안다.) 하지만 그때 임권택 감독처럼 '남자가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임권택 감독이 말한 운전의 필요성은 허세나 멋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언젠가는 그렇게 초라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은 감독도, 명망 있는 평론가도, 30대의 젊은 기자에게도 언젠가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거의 할 수 없는 때가 찾아온다. 사실 운전 조차도 언젠가는 못하게 될 거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운전을 할 수 있다면, 그때까지는 가족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지. 그때까지 나는 운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그날은 운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약 2년 후, 나는 운전면허를 땄다.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할 때는 도리없이 임권택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시험에 합격해 면허증을 받는 날에도 그 말이 떠올랐다. 뭔가 안심이 됐던 것 같다. 운전면허를 가졌으니 이제 예전의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는 그런 안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