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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Mar 13. 2024

월급을 끊으면서 함께 끊은 것

퇴사 14일 차의 기록

퇴사를 했다. 이 문장을 45년 만에 처음 써본다. 이직을 위해 퇴사를 했다면 '이직을 했다'고 썼을 것이다. 이직을 하지 않은 퇴사는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군 제대 후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을 했을 때도 결국에는 퇴사를 했었다. 그때는 학교에 복학해야 했으니, 퇴사라기보다는 전직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이번에는 진짜 퇴사다. 


퇴사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남다를 게 없다. 이직을 해야할 것 같았는데, 이직이 되지 않았다. 그냥 버티려고 했는데, 그것도 마뜩잖았다. 이후 약 3개월에 걸친 고민과 또 3개월에 걸친 준비가 있었다. 퇴사 후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당장 돈을 버는 일이 없다면, 또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그런 상황을 버틸 각오가 되어 있는지. 각오가 된 후에는 계획을 세웠다. 그때는 2023년 12월이었다. 내가 계획한 퇴사일은 2024년 2월 29일이었다. 이왕이면 연말정산을 끝내고 나갈 수 있고, 또 2024년의 휴가를 쓸 수도 있어서 그랬다. 


D-DAY가 결졍된 후에는 준비를 했다. 먼저 월급을 받는 동안 미리 사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봤다. 가끔씩 다니고 있던 헬스클럽 회원권 1년치를 염가에 결제했다. 퇴사 후에 다른 건 못해도 운동이라도 더 자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5테라 바이트짜리 외장하드를 샀다. 퇴사 이후에는 더더욱 아카이빙이 중요할 것 같아서 였다. 포터블 모니터도 하나 구매했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을 떠나서 더 좁은 곳으로 가게 될 때를 위한 대비였다. (사실 옛날부터 갖고 싶었다.)


그리고 아낄 수 있는 돈을 떠올렸다. 매달 꼭 써야 하는 돈이 있다. 오피스텔 월세와 관리비.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 몇몇 OTT 구독료 등등. 꼭 쓰지 않아도 되는 돈도 있었다. 자잘한 것부터 비중있는 것까지 다양했다. 글을 쓰고 메모를 할 때는 베어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이거 1년 이용료가 1만원 정도다. 별로 안 되는 돈이기는 한데, 옵시디언이라는 무료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래서 베어를 끊었다. 유튜브를 하겠다고 매달 어도비 프로그램 구독료로 약 4만 7천원 정도를 썼다. 어도비를 대체하기 위해 파이널 컷 프로와 픽셀 메이트 프로를 결제했다. 한번 사면 평생 쓰는 프로그램들이다. 유튜브 영상으로 파이널 컷 프로를 공부했고, 결국 어도비도 끊어냈다. 그런데 진짜 끊어야 할 게 있었다. 


담배였다. 


스무 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난 하루에 한갑 반 이상을 피우는 헤비스모커였다. 적어도 하루에 7,8천원의 돈을 담배에 쓰고 있었다. 담배를 끊으면 한달에 약 20만원 이상의 돈을 절약할 수 있다. 과연 끊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월급도 끊으려고 하는 마당에 담배를 못 끊는 게 말이 되나란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 가서 금연치료제를 처방 받았다. 예전에도 먹어봤던 약이다. 그렇게 담배를 끊었다. 아니, 담배를 참고 있다. 담배를 끊으려고 해보니 끊는 건 말이 안된다. 그냥 참는 것에 익숙해질 뿐이다. 오늘로서 56일째 금연 중이다. 하루 2갑 기준으로 약 100만원을 절약했다. 


오늘은 공식 퇴사일로부터 14일 째가 되는 날이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긴 휴가와 퇴사 후의 일상은 다르다. 매일 아침 8시에서 9시쯤 일어나 영양제를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신다. 헬스클럽에 가서 간단히 유산소 운동을 한다. 어떤 때에는 근력운동도 한다. 집에와서 식사를 한다.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한다. 그러고 나면 대략 11시 30분 정도다. 아직도 오전이다. 커피를 한 잔 더 내려서 노트북 앞에 앉는다. 청탁 받은 원고를 쓰거나, 유튜브 영상을 편집한다. 어떤 날은 무작정 외출을 하거나, 지인을 만난다. 그런 루틴을 지키려고 애쓰다보니, 직장인과 퇴사자의 삶에서 가장 다른 점이 오전에 있는 것 같았다. 오후는 비슷할 수 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거나 미팅을 하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녁은 더 비슷할 것이다. 집에서 쉬거나,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그런데 오전은 다르다.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만 보고 있어도 다르다. 요즘은 이 오전을 어떻게 더 흥미롭게 쓸 지 생각하고 있다. 


돈을 절약하면서 오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 이게 현재 내가 가장 애쓰는 일이다. 당연히 그렇다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뭔가 애쓰고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이 시간을 그냥 보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위안이다. 이 시간이 그냥 지나가더라도 뭐 하나는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담배는 계속 참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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