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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진 Jun 04. 2024

드라마 '졸업'에서 눈물과 술이 당겼던 그 장면

드라마 '졸업'의 그 장면을 보다가 나도 왈칵 눈물이 났다. 서혜진이 친구 차소영의 사무실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요약하자면, 서혜진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인데, 이 정도의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진심이 터져 나온 순간'. 이렇게 써야 더 어울린다.


설정상 서혜진은 작정하고 술을 마시려고 한 게 아니다. "이상하게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친구의 사무실에 온 것이고, 친구는 얘가 술을 마실 줄 알고 평소 술안주로 즐겨 먹던 반찬까지 싸 들고 왔다. 이 장면에서 혜진은 조금씩 열린다.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친구의 말에 "이 나이에 연애 같은 게 가당키나 해?"라며 자조하고, 그런 감정이 "또래들과 당면과제가 비슷할 수 없었던" 과거와 연결되면서 "주어진 숙제를 성실하게 해치우느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본 게 억울하다"는 속내가 드러난다.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혜진은 과거와 다른 요즘의 자신을 떠올린다. 옛날부터 자신은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속여왔는데, "내가 더 이상 안 속아 넘어가면 어떻게 하지?"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친구가 말의 진의를 묻자, 다음 날 강의 때문에 술을 안 마시려고 했던 서혜진은 이렇게 말한다. "한 캔 정도는 괜찮겠지?" 다음 장면은 이삿짐을 싸는 준호의 장면이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은 서혜진이 차소영에게 이미 준호와의 이야기를 한참 떠들어 놓은 상황이다.

이 장면의 연결에는 시차가 있다. 서혜진은 "나 오늘 진짜 위험했어. 내가 막 걔 스승인 것처럼 굴었잖아. 그런데 오늘 수업 일찍 끝내놓고 나가가지고 걔랑 점심 먹을 뻔했어. 와, 나 진짜 간신히 참았어."라고 말한다. 시청자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굳이 또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그 이전의 이야기는 '생략'해서 이렇게 연출했을 것이다. 서혜진은 스커트를 입고도 한 쪽 다리를 끌어올리고 얘기 중이다. 테이블에는 맥주뿐만 아니라, 와인병도 올라와 있다. 나는 이때 부터 뭔가 울컥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속이고, 마음을 감추었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걸 터트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연출자가 선택한 '생략'이 오히려 그 사이 서혜진으로부터 터져 나온 이야기들의 양과 성질을 상상하게 했다고 할까? 그러고 있는데 서혜진이 머그컵에 와인을 따라 마시고는 문제의 그 말을 한 것이다. "너 걔 봤지? 준호를 안 좋아할 수가 있냐?" 이때 카메라는 서혜진을 바라보는 친구 차소영이 울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나 같은 시청자도 한번 더 울컥한다. 그때 준호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를 보던 서혜진이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어떤 내용의 메시지인 줄 모르면서 나도 눈물이 났다. 아씨... 이게 뭐지. 이준호는 서혜진과 함께 공부하던 시절, 그녀가 써준 쪽지들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걸 본 서혜진은 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그때 준호가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아마도 대본상에서 이 장면은 하나의 씬으로 설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의 씬에서 서혜진의 감정은 -10에서 +100까지 터져 나온다. +100중 +50은 '생략'된 부분에 대한 시청자의 상상 때문이고, +20은 친구와 술 때문이며 +30은 정려원의 왈칵 연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이 모든 상황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쓴 연출 덕분이다. '졸업'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대화의 온도를 보는 것이다. 회사 동료와의 대화는 회사 동료답게, 친구와의 대화는 또 친구와의 대화답게 보여주고, 결정적인 대사가 나올 때는 오히려 힘을 뺀다. 이 장면에서도 테마곡 'Now and Then'(The Restless Age)은 "준호를 안 좋아할 수가 있냐?"란 대사가 아니라, 메시지를 보는 서혜진의 표정을 담담하게 비출 때부터 나온다. 너무 멋진 장면이라, 이 장면만 반복해서 보고 있다. 보고 있으니 나도 술이 당겨서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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